사랑을 주어야 할 때와 멈춰야 할 때
언젠가 아이가 네 다섯살 때, 엄마가 내가 아이를 예뻐 하는 모습을 보며 이야기 했다.
“너는 지금 네가 더 아이를 사랑하는 것 같니? 아니면 아이가 더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니?”
당연히 나는 내 사랑이 더 크다고 이야기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가 어릴때는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 보다, 아이가 엄마를 훨씬 더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때 ‘사랑’이라는 게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분명 나는 아이를 사랑하지만, 나의 사랑에는 하루종일 나 없으면 밥도 못먹고 낯선곳에도 잘 못가고
놀아달라고 떼 쓰는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감이 섞여있다면
하루종일 나를 보고싶어 하고, 필요로하고, 놀고 싶고, 관심받고 싶어하는 아이의 간절한 마음은 그야말로
순수한 사랑 자체가 아닐까?
그러고보니, 어쩌면 무조건적인 사랑은 엄마가 아이를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끔가다 불쑥 불쑥 아이를 기르며 느껴지는 뭔지모를 불공평하다는 느낌이나,
뻔히 아이가 실수한것인지 알면서도 화가 나는 감정들은
어쩌면 내가 어릴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모습이 드러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의 어린애로 있는 나는, 충분히 참지 못하고, 더 사랑받고 싶어서 가끔 내가 낳은 내 아이를 질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는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릴때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도 어릴때 사랑을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고 엄마한테 볼멘 소리로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 만큼 엄마는 나한테 사랑을 충분히 주었냐며
투덜거리는 나를 보며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사랑을 계속 요구하는 아이는 마치 바닷물을 마시겠다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
엄마는 사랑을 계속 주지만 아이는 그 사랑을 받으면 받을 수록 더 목말라하고 끝없이 요구를 하지.
엄마의 사랑을 계속 퍼 준다고 아이가 행복해지는건 아니야.
어느 순간 충분하다 싶으면 멈추는 법을 잘 가르쳐야해.‘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 아이가 계속해서 요구할때 ‘바닷물’을 생각하게 되었고
조금은 차분한 마음으로 아이의 과한 요구에 적당히 선을 긋고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아이와 나의 상태를 잘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사춘기의 딸은 어쩔때는 쌀쌀맞은 모습으로, 혹은 무관심한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주던 부모인 나와 남편의 그늘에서 매일 매일 조금씩 멀어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렇게 품에 안기던 작은 아이가 나를 밀어내는 이 아이와 같은 아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가끔은 그 아이는 이제 사진속에만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눈엔 아직 아기같고 아직도 내 품에서 보듬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내려 놓아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면서 사춘기 딸을 대하는 나 또한 ‘다른 나‘ 임을 인식하게 된다.
낯설고 불편한 이 사춘기 엄마로의 자리매김은 앞으로도 아이가 자라면서
또 계속해서 새로운 자리가 될 것 같다.
어릴때의 육아와 다른 점은 예전에는 내가 당연한 존재이고,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면
자신을 다 지켜주던 엄마라는 존재에서, 이제는 지켜봐줘야 하는 엄마의 자리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다시한번 엄마가 말했던 '바닷물'이 떠올랐다.
내가 아이에게 주고싶은 사랑은 이제는 어쩌면 아이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걸 깨닫는다.
예전에 주던 방식으로, 나에게 의지하고 나의 보호 안에서만 놀던 아이는 이제 자신의 갈 길을 찾기 위해
여기 저기 부딪치고 상처받겠지만, 나는 법을 홀로 터득해서 언젠가는 내 품을 떠나 훨훨 날아갈 것이다.
아기때처럼 나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던 시절은 지났지만
이번엔 내 쪽에서 아이에게 과한 사랑이 나에게도 '바닷물'임을 깨닫고 멈춰야 한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그렇게 했듯이.
사랑이란 가끔 바닷물처럼 참 쓰고 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