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분식집3
오늘도 바쁜 하루를 마친 분식집의 식구들.
연아와 정훈, 진아는 방에서 휴식을 취했으며, 환은 그를 찾아온 이승환 대감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이보게 환이!"
"자네의 장사가 이리 잘 되니 내가 더할 나위 없이 기쁘네! 하하하"
"다 형님 덕분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다 자네의 음식이 훌륭해서 그런 것인데.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지!"
"예? 형님이 뭐가 고마우세요?"
"나야 말로 자네가 늘 많은 채소를 사 가주는 덕분에 큰돈을 벌고 있지 않나?"
"아... 하하하! 듣고 보니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렇지! 하하하하"
덕담을 주고받으며 흥에 겨운 두 사람.
"그런데 형님..."
"왜 그러나 아우님?"
"혹시 이렇게 생긴 채소? 아니 과일을 구할 수 있을까요?"
"어떤 과일을 말하는 건가?"
승환의 물음에 환은 방 한편에 있던 붓과 종이를 꺼내 과일의 그림을 그렸다.
"이게... 이렇게 동그랗고 통통해서... 겉은 또 빨갛고... 녹색 꼭지가 있고..."
"오! 자네 그림도 꽤 잘 그리는군? 내 무엇인지 알 것 같네!"
"그렇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내가 구해주겠네!"
"감사합니다. 형님!"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쓰려고 하는 건가?"
"내 여태껏 이것으로 뭔가 음식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아주 중요합니다. 이 과일로 인해 제가 만드는 음식들이 더욱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 또한 장사치가 아닌 자네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의 한 사람으로서 꼭 구해주겠네!"
"감사합니다 형님!"
"별말씀을 다 하네 아우님!"
"형님~"
"아우님~"
"하하하하하하하..."
이날 밤, 광활한 조선 하늘엔 두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며칠 뒤.
평소보다 장사를 일찍 끝낸 분식집.
원래 조용히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매우 소란스럽다.
원인을 제공한 것은, 조금 전 승환의 집에서 보내온 빨간 과일 때문!
"아니! 이게 다 뭐래요? 이건 남만시(南蠻枾)가 아니오?"
"맞아요 남만시!"
"이걸 음식에 쓸 일이 있소?"
"네! 우리 분식집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아주 중요한 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로 음식을 만든단 말이오?"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남만시로 음식을? 난 도통 이해가 안 가오만... 환도령이 그리 말한다면 그럴만한 연유가 있겠지요."
"네! 보시면 알 겁니다."
"그럼 이 무도?"
"그건 피클... 아니 장아찌를 만들 겁니다."
"무 장아찌 말이오?"
"네... 뭐... 그거랑 비슷한 음식이긴 한데..."
"비슷한?"
"그런 게 있습니다. 이것도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잘 알겠소!"
"정훈아! 넌 나와 같이 남만시를 옮기자꾸나!"
"예 사부!"
환과 정훈은 남만시를 부엌으로 옮긴 뒤 한참 동안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부엌 밖으로 나온 환과 정훈!
환의 손에는 작은 접시가 들려 있었다.
"자 드디어 완성이다!"
"이리 와서 맛을 좀 보세요."
환은 마루에 앉아 기다리던 연아와 진아에게 시식을 권했다.
그의 말대로 맛을 보기 위해 접시를 살펴본 연아.
접시의 안에는 빨간색의 장이 들어있었다.
"이게 무엇이오?"
"생긴 것은 흡사 고추장 같은데... 색도 조금 다르고 끈적거리지도 않는 것이... 뭔가 다른 느낌이오만?"
"그럴 수밖에요!"
"이건 남만시로 만든 장입니다."
"우선 맛을 좀 보세요."
시식을 권하는 환의 말에 연아는 손가락으로 장을 찍어먹어 보았다.
"아이고 시큼해!"
"이게 뭐요?"
"시기만 한가요?"
연아는 환의 물음에 다시 한번 장을 찍어 먹었다.
"음... 다시 먹어보니 단맛도 조금 나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대체 이 시큼한걸 누가 먹는단 말이오?"
"당연히 그것만 먹지는 않지요. 말 그대로 그건 <장> 일 뿐이니까!"
"그... 그런 거요?"
"네! 내일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겠지만... 그래도 궁금하실 테니..."
"정훈아!"
"예, 사부!"
환의 부름에 정훈은 냉큼 부엌으로 달려가 계란프라이를 만들어 왔다.
"계란?"
"네! 계란이지요!"
환은 그 계란 위로 남만시장을 몇 숟가락 얹었다.
그렇게 탄생한 하얗고 노랗고 빨간 빛깔이 잘 어우러진 계란프라이.
- 꿀꺽 -
이를 보고 연아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 이 계란을 어서 드셔보시지요! 노른자를 터트려 장과 함께 섞어 드세요."
"그럼 어디..."
연아는 환의 말대로 우선 계란노른자를 터트렸다.
그러자 흘러내린 노른자가 자연스레 남만시 장과 어우러졌다.
"으음..."
연아는 남만시 장과 어우러진 계란프라이의 노른자와 흰자를 함께 떠서 먹어보았다.
"어머나!"
그 맛에 깜짝 놀란 연아.
흐뭇하게 이 광경을 바라보던 환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어때요? 맛있지요?"
"그... 그렇소!"
"그냥 먹었을 때는 신맛이 세고 뭔가 생경한 맛이었는데... 계란과 먹으니, 신맛과 함께 그 속에 숨어있는 단맛이 모두 느껴지고, 그로 인해 계란의 고소한 맛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오!"
"내 이런 맛은 생전 처음이오만... 이건...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것 같소이다."
"박주모가 그리 말한다면 됐네요!"
"이건 다른 분들도 분명 좋아할 거예요."
"그런데 이 장의 이름은 대체 무엇이오? 남만시 장?"
"아하하하! 남만시 장... 그것도 좋긴 한데, 이름은 이미 승환형님과 상의해서 지어놓았습니다."
"열 개(開)에 조리할 찹(�)! 음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개찹>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뭐... 뭐요? 개찹?"
'이 뭔 해괴망측한 이름이람?'
"내... 내 귀엔 영 이상하게 들리는 이름이오만..."
그러자 곁에서 조용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훈이 연아의 말을 거들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사부! 개찹이라는 이름이 좀 이상하긴 해요. <개떡>처럼 <개>자가 붙으니..."
"꼭 이 이름으로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난 남만시장이 더 익숙하고 좋은 듯 하오만..."
하지만 두 사람의 반대에도 환의 생각은 확고했다.
"아니! 이름은 무조건 <개찹>으로 해야 합니다!"
"처음엔 좀 생소하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두고 봐요! 익숙해지면 입에 쫙쫙 달라붙을 테니!"
"그... 그렇소? 뭐... 환도령이 꼭 그래야 한다면... 나는 상관없소!"
"저도 그렇습니다. 사부!"
"네! 두 사람 다 고마워요."
"그나저나 이 개찹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소?"
"그거요?"
"그건... 정훈이 네가 설명해 드리거라!"
"예, 사부!"
"누나! 이 개찹은 말이야..."
환의 말에 정훈은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남만시를 물에 살짝 데친 뒤 껍질을 까고, 그걸 다시 맷돌에 넣고 갈아!"
"맷돌에 갈아서?"
"그런 뒤, 남만시에 소금과 식초, 조청을 넣고 자작하게 졸여주는 거야!"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이 개찹이지!"
"생각보다 간단하게 들리네?"
"어허! 간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건 그야말로 시간과 정성을 쏟아야만 가능한 거야!"
"그...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당연하지!"
"그런데 환도령, 함께 만든다던 무 장아찌는 어찌 되었소?"
"그것도, 이미 만들어 놓았어요! 다만 맛이 배어들어야 하니 2~3일 정도 지나야 해요. 그러면 먹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분명 내가 아는 무 장아찌는 아닌 거지요?"
"아예 다르지는 않습니다만... 조금 다르긴 해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알겠소!"
연아와 대화를 마친 환은 만족한 듯 크게 기지개를 켰다.
"하하하하! 내가 조선 최초의 케첩을 만들었구나!"
'케첩? 개찹이라더니, 저건 또 뭔 소리래...'
환이 이상한 소리를 할수록 점점 더 그의 정체가 신경 쓰이는 연아였다.
**********
조선 최초의 케첩이 만들어진 다음날!
연아네 분식집을 찾은 반가운 얼굴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구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장성대군과 함께였다.
"아니 이놈아! 이게 뭐라고 이 난리를 피워? 밥이야 연화각에서 먹으면 되는 것을! 왜 굳이 날 이런 곳까지 끌고 와서 줄까지 서게 만들어?"
"대군... 아니, 나으리! 제 말씀을 한번 믿어보시라니까요? 제가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서 가장 맛있는 밥이었습니다."
"밥이 다 거기서 거기지... 너도 참 이 난리를 피우다니?"
"아무튼, 내 너 때문에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만약 네놈 말처럼 맛이 없을 시엔 내 너를 엄하게 야단칠 것이야!"
"그런 걱정은 전혀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당연히 좋아하실 거고, 저도 혼날 일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 알겠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장성대군은 구길과 함께 평상에 앉아 분식집을 둘러보았다.
여느 주막집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풍경.
이곳이 뭐가 그리 특별하기에 이리 많은 손님들이 있는 건지? 다만 특이한 것은 손님들이 먹는 음식이 그가 여태껏 본 적 없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는 점이었다.
"이보시오!"
"예예! 갑니다~ 가요!"
구길의 부름에 진아가 두 사람이 앉아있는 평상으로 달려왔다.
"그래! 너로구나?"
"앗! 안녕하세요? 또 오셨네요."
"날 기억하는 것이냐? 허허 그 녀석 참!"
"예! 나으리, 오늘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저번의 그 김치볶음밥도 맛있었는데... 그것도 또 먹고 싶긴 하지만 난 이미 맛보았으니..."
"여기 이 선비님께는 김치볶음밥을 드리고... 내게는..."
"가만있어보자!"
잠시 고민하던 구길은 옆 손님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래! 저 손님이 먹고 있는 저 노란 것은 무엇이냐? 무척 맛있어 보이는데... 저건 어떠냐?"
"그럼요! 잘 보셨습니다. 저 밥 또한 정말 맛이 좋습니다."
"그럼, 내겐 저 밥을 다오!"
"예, 알겠습니다."
구길의 주문을 받고 부엌으로 향하는 진아.
그런 진아를 구길이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런데 얘야!"
"예, 나으리!"
"내가 시킨 밥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건..."
"<계란이불밥>입니다."
"계란... 이불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