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이는 꽤나 오랜 준비가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느낌은 느낌뿐이었고, 현실의 나는 '그 일'을 맞닥뜨려서야 '준비' 다운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일 외적으로는 사고가 잘 정립되지 않고 매우 자유분방한 편인데, 그래도 '목표'는 지향적이어서, 여행의 목적을 정하는 것부터 '준비'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제주 한 달 살이 목적; 자연-힐링-건강, 폐관수련-공부]
즉, 한 달의 시간 동안 자연을 많이 보고, 힐링하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증진하자.
즉, 건강하고 조용한 곳에서의 폐관 수련을 통해 배움을 정리하자.
그리고 실천한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염색 2. 편안한 복장 (원피스는 하나만!)과 전공서적 몇 가지로 짐 싸기
필자는 학창 시절을 비롯하여 대학-대학원을 거치는 동안 한 번도 탈색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별로 하고 싶지 않았고, 검은 머리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색은 핑크로, 이 기회에 한 번 내가 핑크 머리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이러한 도전과 변화의 결과는 생각보다 흡족해서, 오히려 핑크머리를 유지하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내가 아는 한 현직 수의사 중에는 핑크머리가 없다. 이는 신뢰와도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구태여 보호자를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은 백수 상태의 자아만이 핑크색 탈을 쓸 수 있다 다짐하고 이를 마음껏 즐기기로 하였다. 사담이 길다. 여하튼 자유를 상징하는 핑크는 여행 준비 목록의 하나였다.
또 한 가지로는 미니멀리즘이 필요했다. 공간에 대한 애착이 큰 편이라서,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공간을 최대한 꾸미는 나였지만, '보통의 한 달 살이'에 필요한 짐을 가져간다면 '힐링'이 아니라 '킬링'여행이 될 듯하여 모든 짐은 최소한으로 꾸렸다. 이 여행에서 만큼의 나는 자유롭고, 모든 자연에 염결 하고 싶은 마음이 컸으므로, 하지만 역시나 가져오고 보니 가져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이 보인다.
-필수 목록-
인생의 동반자
; 이는 핑크머리지만 상당히 유교적이고 조선여자라는 별명을 가진 나에게 있어 가족을 뜻한다. 또한 현대사회에 보편적인 가족 구성원을 뜻하며, 이는 species(종)으로 볼 때 human과 canine 또는 feline으로 구성되는 편이다.
우리 가족의 한 구성원은 털이 많이 달리고 문자를 익히지 못한 까닭으로, 비행기가 아니라(알아본 바로는 아직 6키로 이상의 강아지들은 화물칸에 타야 하므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이동해야 되었다. 하쿠는 가족이 함께하면 차분하고 조용한 시바견으로 (아침산책에서 발톱을 다쳐 드레싱을 해주려 했지만, 시바 스크림을 불러 난리를 피운 것을 제외하면) 완도까지 가는 차 여행과, 완도에서 제주까지의 배 여행을 잘 견뎌주었다. 사실, 이 부분에서는 반려동물 문화가 발전된 도움이 컸는데, 우리가 탄 <한일고속페리-실버 클라우드호>는 펫존 (오천 원의 추가 요금이 필요해서 조용한 쿠는 우리의 좌석 옆에 있었다.)도 있고, 펫 여권도 만들어 주는 (미리 신청이 필요하다.) 펫-친화적인 배였다.
갑판대에 올라가 보니 바람이 매우 거셌다. 이렇게 큰 배가 뜰만큼, 물은 얼마나 깊은 걸까? 출렁이는 푸른 바다 빛이 무섭기도 하고 매력적이기도 했다. 이 많은 물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걸까? 어쩌면 큰 바다를 건너는 이 배처럼, 우리는 큰 문제의 겉을 살짝 스치듯이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몰라. 너무 무겁고 깊게 생각하지 말자. 행복하게, 건강하게, 가벼워져서 오는 거야! 다짐했다.
제주항에 도착한 우리는 동쪽으로 향했다. 제주 동쪽은 자연이 아름다운 곳으로, 우리의 여행 목적과 일치하는 공간적 배경이다. 한 달 살기를 하기로 한 숙소는 이층 집이었는데, 하쿠는 이런 구조를 처음 봐 신난 탓인지, 오랜 시간 이동하느라 몸이 찌뿌둥했던 탓인지 신나서 뛰어다녔다.
일단은, von voyage 는 성공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하지만 다짐과는 관련이 없이, 제주에 도착한 첫 이틀 동안 놀고먹기로 한 것은 사촌들이 방문 덕분이었다. 우리는 서로 성인이 되고부터는 어느새 각자의 삶을 살다가, 할머니의 장례식을 계기로 슬픔을 공유하며 매우 가까워졌다. (보고 싶은 할머니. 우리 할머니, 김옥출. 옥출이 할머니를 언제나 사랑한다.) 이후 사촌들과 나는 좋은 여행 메이트가 되었는데, 제주도 한 달 살기의 첫 시작을 이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제주 동쪽의 작은 집은 이내 시끌 복작 웃음소리가 넘치게 되었다. 어쩌면, 큰 포부로 시작한 제주 한달살이였지만, 처음부터 우리뿐이었다면 두렵거나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사촌들의 방문과 한바탕 관광으로 인해 제주도가 조금은 더 빨리 익숙해졌다.
제주도에서의 첫 인상은 자연에 대한 경외감 이었다.
여행 첫날, 방문한 아침미소 목장은 동물복지농장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유제품은 상품화되어 팔리기도 한다. 생각보다 관광 규모는 작았지만 초원과 그 위에 누워있는 소들은 수의학에서 접하는 경제동물의 삶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수의학에서의 대동물은 반려동물이 아니라 경제동물이다. 따라서 대동물 의학을 배울 때는, 경제적 가치에 따라 운명과 처방이 달라지는 것에 적응하기 힘들었었는데, 이곳 소들은 푸른 초원에 고양이처럼 발을 자신의 품속에 넣고 식빵을 굽고 있었다. 제주 동쪽은 자연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개발된 곳이 적었는데, 따라서 자연 본연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곳이 많았다. 이를 배경으로 유유자적 거니는 소들을 보니 조금은 덜 미안해도 되는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초원, 평야, 들판을 배경으로 멀리 보이는 눈 덮인 한라산은, 아직도 사람들은 자연을 대함에 있어 고쳐야 할 태도가 많다는 경외감을 심어주었다.
식빵 굽는 소들과 목장의 정경. 거창한 깨달음 뒤에 부끄럽고 사소한 고백을 하자면, 목장에서 먹는 우유 아이스크림은 특히 진하고 매우 맛있다!
두번째 인상. 온통 바다, 바다! 우리는 비로소 섬에 갇혔다!
산을 둘러보고 나온 곳은 바다였다. 화산섬이라 그런지 진흙 섞인 파도가 아닌, 깨끗한 초록빛-푸른빛의 잔잔한 물을 낀 해변이 매우 인상 깊었다. 고운 모래는 발에 패이는 순간 맑은 물을 토해내었다. 현무암 돌로 이어진 해변 귀퉁이는 초록 이끼들이 끼여있는데, 돌 틈 사이 곳곳이 작은 제주도다. 분지에서 나고 자라 원래 바다를 잘 보지 못해서 이렇게 실컷 바다를 볼수 있는, '바다 건너 바다'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변을 따라 놀다가 성산 일출봉이 보이는 유채꽃밭에 도착했다. 구멍이 난 현무암은 제주의 돌담을 구성하는데, 돌담 너머에는 유채꽃밭이 한창이었다. 검은 돌담과 현무암처럼 듬성듬성 초록빛 구멍을 품은 노란 유채꽃 밭은 기쁨과 안락함 그 자체였다.
그 날 뇌리에 꽂힌 것은, 한 편집숍에서 읽은짧은 독립 단행본의 제목이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을 보냈다, 장하련, 청춘 문고], 시간들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표현이 재미있었다. 그렇지. 어떠한 시간들은 분명 유통기한이 있다. 일정한 시간들을 보냈음에도 끝내고 보았을 때, 정말 일말의 감정도 의미도 남아있지 않던 어떤 시간들처럼, 유통기한을 꼭 확인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어렸을 적, 유통기한이 지난 시간들이 아까워 자꾸 줏어 먹고 배탈이 나곤 했던 나를 이제 놓아주기로 했다. 그런 나를 붙잡고 있는 것 또한 유통기한이 지나버렸기 때문에. 짧은 편집샵 한 구석에서 꽤나 집중을 하고 나니, 문득 제주의 책방도 궁금해졌다. 언젠가는 꼭 가야지. 새로운 공간에선 문장에 더욱 집중할 수 있고, 문장들이 나에게 내리는 객관적인 판단에 수긍하기가 쉬워진다. 책방은 언제나 힌트와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공간인데, 제주에서라면 더욱 의미가 깊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쿠와 잘 함께하기 위한 사전 답사라는 핑계
누나는 휴가온 사촌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느라 쿠는 하루 종일을 부모님과 함께했는데, 돌아오니 눈물을 흘릴 것 마냥 잔뜩 삐친 쿠가 보인다. 어제 사촌들이랑 여행 계획을 짜는 데도 함께하고 싶어서, 깜깜한 밤중에 켜진 형광등이 눈부신 와중에도 옆에 와서 졸던 쿠다. 거대한 자연의 웅장함을 보고 왔더니, 눈앞에 짠! 하고 나타난 이 작고 사랑스러운 영혼을 어찌해야 할지! 너무나 귀여운 쿠. 그래도 널 최고로 사랑한다는 말로 변명을 해 본다. 난 노란 털빛을 띄는 쿠를 가리켜 "내 작은 호박"이라 칭하곤 했는데, 이제는 " 내 작은 한라산"이라 불러야겠다. 그만큼 쿠는 나에게 큰 존재다. 이제 답사를 통한 의미파악은 끝났으니, <쿠와의 실전 제주생활>이 펼쳐진다!
늦게까지 일정 짜는 누나들이랑 놀고 싶어서 계속 이층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결국 가로로 끌려나가는 쿠. 눈빛엔 미련을 담고 있지만, 졸려서 어떤 저항도 못한 쿠. 담엔 나랑 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