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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구슬 Mar 18. 2022

4. 한라산, 백록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세상 제일 아름다웠던 풍경

사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여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백두산 천지를 사진으로만 볼 수 있듯, 한라산 백록담도 으레 거기 있겠거니, 저렇게 생겼겠거니, 아 예쁘다~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한라산 백록담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는 생각보다 매우 컸다. 제주도 한 달 살기의 화룡정점으로 여기시며 기대 반, 걱정 반 하시는 부모님 옆에서 가지 않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려보았으나 '나는 가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왠지 부모님의 부푼 꿈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자식 된 도리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라산 등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한라산 등반을 '경험'의 문제라고 보셨던 것 같다. 제주도에 와서 올레길을 다니며 쌓은 체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높은 한라산을 등반한다니! 운이 좋으면 물고인 백록담까지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가! 우리 모두 같이 가자고 재차 권유하셨다. 하지만, 불효녀의 입장에서의 한라산 등반은 '가능성'의 문제였다. 이건, 불가능하다. 나의 체력은 태초로 돌아간 지 오래라고 생각했다. 나의 오장육부는 한라산의 중턱에서 뒤틀려져 버릴 거라고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하쿠도 문제였다. 하쿠가 11시간 동안 집에 혼자 있어야 한다니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슬쩍, 나는 집에 남아있는 게 어떻겠냐고 부모님을 설득해 보았으나, 쿠는 연습을 많이 했으니(쿠가 허리 증상 때문에 또는 반려동물 동반이 되지 않는 경우 집에서 기다리는 훈련) 하루쯤은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이런.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등반 날짜가 다가올수록 이제 큰일 났다!라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등반 예정일 3일 전, 어떠한 문제 X가 발생했다. 등반 이틀 전, 스트레스로 인해 컨디션이 매우 난조 했다. 이대로면 정말 등반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한라산 등반'은 희미해지고, 문제 X의 해결방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나는 평소에는 정말 생각이 없는 편인데(대학원 때를 제외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생각이 한 가지 들고나면 계속해서 골몰하게 되는 편이다. 문제 X에 집중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이젠, 등산 스틱과 등산화를 예약하셨다. 문제 X에 사로잡혀 눈앞에서 흘러가는 상황에도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새벽에도 잠이 잘 오지 않아 뒤척였다. 이런 내가 내일 한라산을 간다고?


새벽 당일,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쿠를 산책시키시고, 밥을 먹이셨다. 어머니는 일찍이 김밥을 싸셨다. 불효녀는 6시에 일어나 쿠를 안아준 다음 베개를 챙겨 차 뒷자리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1시간 후, 7시경 우리는 한라산에 도착하였다. 이런. 이건 현실이었다. 우리가 등반하는 한라산 성판악 코스는 세계 자연문화유산인 한라산을 등반하고 백록담까지 볼 수 있는 코스 2가지 중 하나로 길이가 매우 길다. 편도 9.6 km-왕복 19.2 km, 왕복 9시간이 걸리는 악명 높은 코스이지만, 겨울철에는 눈 때문에 일반인들은 험준한 나머지 코스보다 이 코스를 일반적으로 등반하게 된다. 9시간 등반이라니 말이 되는가? 공부를 9시간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등반을 9시간 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한다는 거야? 머릿속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등산스틱의 길이를 맞추고, 등산화를 신는 동안 점점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 X가 내 머릿속을 가장 큰 비율로 차지하고 있었다.

첫 번째, 성판악에서 제1 대피소인 속밭대피소까지는 4.1km로 약 1시간 20분이 소요되는 완만한 코스이다. 특이하게 생긴 나무들과 돌(화산지대 답게)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숲을 열심히 걸어 나갔다. 그러나 문제 X는 점점 더 생생해졌다.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에 대한 ABCD와 abcd를 생각했다. 주변의 풍경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약 40여분이 흘렀다. 아.. 이제 좀 힘든데? 한라산 등반이 힘든 만큼 탐방로 곳곳에는 남은 거리와 시간이 표시되는데 이제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깜짝 놀랐다. 문제 X에 골몰하여 열심히 걸었는데도, 남은 거리가 줄어들지 않은 느낌이었다. 슬슬 현실적인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가다간 나는 백록담을 보지 못할지 모른다. 이곳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하지만 별 수없는 관계로 어찌어찌 걸어 나갔다. 그런 채로 나아가다 보니 드디어 속밭대피소에 도착해 있었다. 당 충전을 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역시, 그렇게 심각할 때는 뭐라도 먹어야 된다.

두 번째, 속밭대피소에서 진달래밭 대피소까지는 3.2km이다. 속밭대피소까지는 다소 완만한 지형이었지만 이 구간부터는 경사가 있는 곳이 점점 많아진다. 지형 또한 험준하고 (화산이었기 때문에 어떤 곳은 흙보다 돌이 더 많은 것 같다.) 지대가 높아 녹지 않은 얼음들이 수북하게 쌓여있거나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엔 녹아서 물웅덩이를 만들어 놓는다. 한라산의 설경 덕분에 겨울 등반이 제일 아름답다고 하나, 3월 중반 또한 눈이 매우 많았다. 어떤 곳은 스키장이나 다름없을 정도. 산세가 험준해지니 문제 X에 대한 생각을 접어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마당에, 눈앞에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지 문제 X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 등산을 하는 동안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 문제 X는 산 밑의 내가 해결하겠지. 그러고 나니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 비슷한 잎을 가진 저 풀은 무엇일까? 판다가 먹는 그 풀인가? 싶었는데 어머니께서 제주조릿대라고 하셨다. 신기했다. 숲은 점차 깊어지고, 돌이 많아졌다. 문득,  문제 X에 대한 해결방안인 '가나다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해결방안들이 있으니, 편하게 생각하자. 간단하게 생각하자. 하는 사이 정보 x가 도착했다.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 쓰러져 눕고 싶었지만 이미 한 시간 반씩 2번이나 왔다. 한 시간 반을 더 가면 정상이라는 생각에 김밥 몇 개를 주워 먹고 탈탈 일어나 출발했다. 문득문득 쿠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 쿠는 가족들이 모두 새벽에 일어나 분주하여, 자신도 같이 놀러 가는 줄 알고 매우 신이 났다. 빙글빙글 돌며 기쁘게 장난감을 던지고 흥분했던 쿠는 가족들이 "쿠야 갔다 올게 잘 기다리고 있어~!" 하는 순간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가만히 망부석처럼 우리를 바라보았다. 하쿠가 보고 싶었다.

세 번째, 울고 싶었다. 눈이 왜 이리 많은지, 왜 가도 가도 길이 줄지 않는지, 이미 두 다리는 마비가 되었고 호흡은 더욱 힘들어졌다. 정상까지 가는 마지막 구간이라 계속 계속 계단과 경사였다. 길이 미끄러워 아이젠도 힘을 잘 못쓰거나, 스틱을 찍으면 눈에 푹푹 박히는 그런 상황. 이것을 이겨내가야 한다. 백록담이 가까이 있다. 그와중에 갑자기 머릿속에서 문제 X에 대한 해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볼까?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해결법 A*는 의외로 좋은 선택지 인지도 모른다. 아니, 괜찮은 선택지이다. 그렇게 가다 보니 어느새 나무가 바뀌었다. 어떤 나무는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고, 침엽수(주목 등)는 여전히 푸르른데 그 둘 사이에는 죽어 쓰러진 흰 나무(찾아보니 구상나무라고)까지 있었다. 정상에 오를수록 가팔라 좋은 점은 이제 제주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가까이는 출렁출렁 이어지는 산세가 아.. 나 정말 많이 왔구나 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저 멀리 제주도가 섬이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해안로와 푸른 바다, 그리고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이 보였다. 아. 정말 우리나라 최고봉이 맞는구나?! 하지만 눈앞에는 백록담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길이 남아있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무렵, 앞 쪽에서 '진짜 다 와간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힘을 냈다. 정상까지 이어진 긴 줄이 있길래 보니, 백록담 바위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의 줄이었다. 1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길래, 나는 그럴 수 없었으므로 바로 백록담으로 갔다.

도저히 올라갈 때는 찍을 수 없어서 내려올 때 찍은 사진.

예뻤다. 살짝 녹은 물과 얼음이. 언젠가는 물먹으러 사슴이나 다람쥐 같은 귀여운 동물들이 올 것 같은 분화구 저 밑의 샘이 매우 아름다웠다. 분화구는 매우 매우 커서 그 안에도 작은 식생 분포가 있었다. 바람은 매우 불었고, 가려주는 이 하나 없는 지구의 민낯에는 햇빛이 너무 강렬하여 머리가 살짝 아팠다. 주변을 둘러보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상까지 온 모두들 매우 안도하여 보였으나, 백록담에 매우 고무되어있었으나, 웃질 않았다. 웃을 수 없었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아... 내려가는 것도 두려웠다. 어떻게 여기를 다시 내려가지? 그런데 이곳에 어떻게 올라왔지? 뭐 여하튼 모든 것을 잊고 일단 백록담을 즐기기로 했다. 조용히. 고요하게. 처음 본 풍경이라 그랬을까? 백록담을 뒤돌아서도 너무 생생했다. 세상은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이렇게 산은 높고, 분화구는 그릇처럼 움푹 파여서 저렇게 예쁜 풍경을 담았을까? 화산은 언제 활활 불타올라서 이렇게 예쁜 것을 만들어 놓고 푸르게 변하여 우리를 불러들였을까? 그리고 산 정상에서 나는 해결법 A*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뭐 그리 깊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었다. 이러한 허심탄회한 해결법을 생각해낸 것은 아마 공간의 역할이 컸던 것 같다. 한라산의 정상은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한 가지 확실한 느낌은 지구라 부르기에는 너무 높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늘이 더 가깝게(그럴 수는 없지만) 느껴졌다.

정상에서 부모님은 김밥을 드셨지만, 나는 에너지바 한 개와 천혜향 몇 개를 먹을 수 있을 뿐이었다. 너무 힘들었다. 등산화를 벗고 돌에 기대어 조금 쉬었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는 독수리가 하산시켜주던데, 우리는 주변에 용암이 흐르는 위급한 상황도 아니거니와 세상을 구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스스로 하산을 해야 했다. 쿠도 보고 싶었다. 우리 귀여운 쿠가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니 한달음에 가고 싶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정상에 올라서도 시간은 12시밖에 되지 않았다. 걱정했던 것보다 쿠는 아마 내가 직장에 나갔을 때처럼 태연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정상의 뜨거운 햇빛이 안심시켜주었다.


 또 4시간 반이 걸린다니! 하지만 내리막길은 쉽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다. 아니었다. 곳곳이 험한 얼음길이라 천천히, 조심히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완만한 구간은 내리막길이나 오르막길이나 시간이 비슷하게 소요되었다. 가다가 표지판을 보고 믿을 수 없어 눈을 비비고, 다시 이제는 많이 왔겠지 기대하며 표지판을 보다가 실망하기를 반복. 그냥 오를 때처럼 그저 묵묵히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리는 고통을 너머 마비가 된 지 오래였다. 숨이 차올라 머리를 쥐어짜 내어 해결법을 강구해 보았다. 한 걸음이 1m이면 내가 1,2,3,4,5,6,7,8,9, 10걸음 걸었으니까 10m 왔네! 이 과정을 10번 하고 와! 왔다 100m! 하면 겨우 0.1 km를 온 셈이었다. 울고 싶었다. 부모님은 마지막 구간의 하산길에서 한결 마음이 편해지셨다고 한다. 그토록 해보고 싶던 일을 해보셨다고. 따지고 보면, 나는 그토록 해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고 보니 해낼 수 있다는 성취감을 얻게 되었다. 나는 분명 안된다!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막상 하고 보니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느낌은 매우 정직한 기쁨이었다. 이 세상에는 내가 해낼 수 있는 일들이 생각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으로 직접 본 한라산 백록담은 생각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지구에는 이런 곳도 있다!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내려오는 길 내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배달음식이었다. 어떤 회를 먹어야 할까. 매운탕은 주겠지? 고민하며 힘을 냈다. 어쩌면 사람은 참 단순하다. 극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견디며 걷다 보니 빼꼼하고 출입구가 나타났다. 진짜 뿅! 하고 나타나서 웃겼다. 만세! 하지만 얼굴은 웃을 수 없었다.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커피..라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기절하였고, 집에 도착해서 미친 듯이 반가워하는 쿠와 소회를 푼 뒤에 따뜻한 물로 씻었다. 쿠는 너무나 잘 기다리고 있었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했다. 저녁은 꿀맛이었다.

잠들기 전에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은 오는 길에 주차장까지 데려다 주신 택시 기사님의 이야기였다. "한라산에 눈이 아직 많아 힘들었지요? 그래도 제주도에는 눈이 많이 와야 해요. 비는 다 쓸려가 내려가 버리기 때문이지요. 눈이 많이 와야 지하수로 공급이 되고 우리가 쓸 수 있어요." 비록 눈은 등반을 더욱 힘들게 했지만, 설경은 너무나 예뻤고, 그 사이로 졸졸 흐르던 물은 너무나도 깨끗했다. 그리고 그 눈 덕분에 백록담에도 물이 고여있었다. 그리고 그 눈 쌓인 한라산을 올라갔다 내려간 나는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눈은 제주도를 살리고, 나도 키웠다. 그리고 달라진 나는 쿠를 쓰다듬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깊은 잠이 들었다.

수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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