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야가 침대에 누워서 콧구멍만 살짝 내보일 때나 푹신한 이불에 파묻혀서 곤히 잘 때 나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새로 산 벨벳 느낌의 잠옷이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가을바람을 덮어줄 때 나는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낀다.>
이게 무슨 사연이냐고? 맞다. 사실 이건 사연이라기엔 너무 소박하고 일상적이다. 하지만 세상엔 어두운 면도, 무서운 면도 많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범하고 포근한 사연을 보내는 것이 더 대단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건강하게, 재밌게 지내고 싶은 마음. 영원할 수 없어서,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지내는 그런 이상적인 사연들을 좋아한다.
사연이 있다.라고 시작했다고 우리의 힘들었던 여정(무 항문증 하쿠가 정상적인 실내견으로 살아가는 과정이라던가. 그 과정에서 겪은 우리의 우당탕탕 체험기라던가.)을 풀어놓고 싶지는 않다. 대략적으로 우리는 개울을 첨벙 뛰어넘고, 가끔씩은 생각지 못했던 돌길을 마주할 때도 있지만, 서로 도와가면서 열심히 전진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도 간략히 소개를 하자면, 하쿠는 무 항문증 강아지로 실험실 생활을 하다가 나와 인연이 되어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 변실금도 심하고, 위장관 증세도 너무 심해서 고생하던 어린 아기 강아지는 지금 모든 증세가 상당히 호전되어 거의 (95% 정도!) 정상적인 강아지로 생활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쿠 이야기>에...)
P.S. <하쿠 이야기의 최신 근황! 하쿠 팬티를 개선시켜 바지를 만드는 노력을 하고 있다. 휴무날 쿠와 같이 애견 동반 카페에 가는 재미가 쏠쏠한데, 하쿠 팬티는 아무래도 조금 부끄럽다. 그래서 요즘 휴무날에는 실외용 바지 제작 연구 중!>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마치 무서우리만큼 교묘해서 어쩌면 연가시와 사마귀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기도 할 때가 있다. 번아웃 후 내리 잠만 자게 되던 때가 있었는데, 새로 태어난 것처럼 머리가 개운하고 편안했다. 그 시간에 쿠랑 누워서 빈둥빈둥거렸는데 아. 내가 너무 나를 소진해 버렸구나. 하는 자책과 함께 진정한 쉼은 일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마치 폭주 기관차는 커브를 잘 돌 수 없는 것처럼, 망가진 정신은 꼭 잘못된 곳으로 처박혀 버리게 한다. 제주도를 가기 전에도 쉼이 필요했다. 그리 오래는 아니라도 말이다. 상실과 슬픔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잠깐이나마 흐트러진 나를 정리해 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일상과는 동떨어진 곳. 하지만 외국은 너무 멀다. 비행기를 타고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으로 가기엔 잃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당장의 나에게 소중한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 없이는 여행도 여가도 의미가 없다. 소중한 것들은 티 없이 맑고, 착하고 순수하고 보기만 해도 빙그레 너털웃음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시바견이랑 수의사는 함께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갔다.
계획을 정하고 가진 않았다. 사실 제주의 한달은 긴 시간이었기 때문에, 오늘 못가면 내일 가지뭐 하는 심정으로 우리는 한가롭게 그때그때 행선지를 정했다. 대부분 완벽했고, 완벽하지 않은 것들은 편안했던 여행이었다.
삼월의 제주에서 마주한 풍경
그리운 그대에게.
아침 일찍 비가 내려 까만 돌담은 아직 촉촉한데, 초록 잎사귀는 무성하고, 붉은 동백은 우수수 떨어져 있는 풍경.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왜 유명한지 이해가 안 되는 작품들이 있었다.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몬드리안의 작품도 그중 하나였는데, 너무 단순해서 오만하게 감상하게 되는 것들. 그런데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것들은 단순하지만 강렬함이 깃든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제주 돌담의 까만색. 유채꽃의 노란색, 동백의 빨간 꽃과 초록 잎사귀, 에메랄드 빛 바다, 파란 하늘과 하얀 설산의 대비. 그리고 쿠와 내가 나누는 대화 "사랑해".
어린 시절, 동네 구석진 작은 공간에 만발해 있던 유채꽃들. 왠지 모르게 그 공간을 열심히도 채우던 노란 유채꽃들. 여기 이 시간에도, 이 공간에도 돌담으로 구분 지어진 면적을 성실히 노랗게 물들인 유채꽃들. 한 다발, 한 움큼 쥐어도 흘러넘치는 그들. 어린 시절의 나를 생생하게 불러온 강열한 노랑.
망망대해 어디선가 돌고래가 갑자기 나타나 무리 지어 자유롭게 이동하던 모습. 거친 파도의 물결을 닮아 역동적으로 일렁이던 그들의 모습. 친구들이 많아 참 다행이다 안심되던 바다의 돌고래들.
동그라미 하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동그라미들. 두 눈동자에 모두들 기대를 품고 쳐다보느라 부끄럽겠다. 기대와는 달리 동그라미는 쉽사리 그 시작과 끝을 보여주지 못하고 구름에 가려버렸다. 수평선 위로 일출과 일몰 보기가 어렵다고 하니 사실 서운할 것도 없다. 그저 예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새벽과 늦은 저녁 하늘을 또한 아름답게 물들이는 그 친구는 좋은 녀석이다.
숲 속 평상에 누워보니 시원한 바람이랑, 사라락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로 가득하다. 위로 뻗은 기둥 위로 엉성하게 하늘을 덮은 역광의 나뭇잎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 보이는 하늘. 자유롭다.
엄마 아빠랑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얘기 중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쿠를 데려온 것. 깔깔 웃는 우리들 사이에서 귀를 번갈아 쫑긋쫑긋 거리며 조용히 우리를 쳐다보는 하쿠의 검은 눈동자와 금색 속눈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