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있는 삶, 좋지 아니한가?
현재 상태는 과거선택의 결과다.
같은 논리로 현재 내가 가진 나의 물건 역시 과거 내 선택의 결과다. 그 선택에는 여러 기준이 있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기능이다. 필요가 먼저 발생했고, 목적을 위해 어떤 물건을 선택하고, 구매했을 것이다. 당연히 그 과정에는 몇몇 선택지가 존재했을 것이고, 당시 상황에 적합하다는 판단에 의해 해당 물건은 현재 내 손에 들어와 있다. 우연한 그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 지금도, 가까운 미래에도 함께 할 것이다. 기능에 만족했다면 이후는 자연스럽게 경험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기능에 만족했으니 당연히 좋은 경험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사용자의 니즈를 만족시킨 그 물건은 나와의 인연을 이어간다. 기능과 경험의 영역을 넘으면 다음은 정체성이다. 나의 선택은 곧 나를 상징하는 실체적 존재가 된다. 물건에 취향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 하나씩 둘씩 쌓이다 보면 하나의 군(群)이 된다. 물건의 역사가 곧 개인의 정체성으로 굳어진다. 이 과정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대체되거나 잊히는 많은 물건들을 기억해 보자. 정체성 영역까지 오는 물건이란 것은 대단하지 않은가. 다시 정리해 보면 선택되어 발전하는 물건은 이렇게 발전한다.
기능 → 경험 → 정체성
작은 소품 하나에도 취향이 있다.
애플의 아이폰과 삼성의 갤럭시는 기능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 LG의 TV와 삼성의 TV 간 미묘한 차이를 보통의 사람은 알아차리기 어렵다.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는 같은 계열의 그룹사지만 어느 브랜드의 차를 구매하느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물론, 같은 급이라면 기능이나 옵션의 차이는 미미하다. 다른 객관적인 말로는 설득되지 않는 취향의 영역이다. 물론 경험이나 기억 같은 개인적 요인이 무의식 중에 관여했으리라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작은 종이클립이나 매일 쓰는 칫솔 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물건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얼마 전 딸과 함께 올리브영 매장을 찾았다.
딸느님이 상품을 고르는 동안 남성화장품 코너를 기웃거렸다. 당연히 아이쇼핑이 목적이었다. 그러다 애프터쉐이브 제품코너에서 로션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샘플 제품의 캡을 열고 손등에 조금 발라서 냄새를 맡았다. 잊고 있던 좋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바버샵에서 은은하게 퍼지던 향의 기억. 이런 제품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번 했지만, 금방 잊어버리고 나오곤 했다. 이걸 여기서 찾았다.
온라인과 비교하니 제법 가격 차이가 오픈마켓으로 주문했고, 조금 전 집 앞에 배송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구매 시 제품 후기를 보니 나와 같은 케이스가 제법 많았다. 바버샵에서 맡아봤는데 무슨 브랜드인지 몰랐다는 전제는 나와 완전히 일치했다. 전문 헤어스타일리스트가 쓰는 제품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향을 찾았고 대체적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취향이 나의 취향이 될 수 있는 지점에 나는 서 있다. 그 물건의 브랜드명은 클럽맨피노드 애프터쉐이브 로션이다.
취향은 완료형이면서 현재 진행형이다.
살아가면서 계속 만들어지고, 대체되고 변한다. 그래서 더 의미 있다. 내가 선택해서 나의 물건이 되는 인연은 어찌 보면 신기하다. 많고 많은 물건 중에서 그 하나가 나의 삶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인연은 사람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아닌 존재들, 동물이나 식물, 무생물과의 인연이 있다고 믿는다. 때로는 물리적으로 실체가 없는 개념이나 사상, 생각과도 인연의 끈은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나와 한 번 인연을 맺은 그 무엇은 나를 상징한다. 그 힘은 나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한다. 그래서 인연은 사소한 것이라도 허투루 볼 수 없다. 오늘 저녁 퇴근하면 나는 새로운 작은 인연을 만난다. 사소하지만 기분 좋은 애프터쉐이브로션의 향은 삶의 영역으로 조금씩 퍼질 수 있다. 항상 새로운 만남은 나를 설레게 한다.
설렘 있는 삶이라니, 좋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