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한 의미
스포가 있습니다.
줄거리를 알아도 괜찮지만,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보고 싶은 분은 뒤로 돌아가 주세요
일본영화나 드라마는 참 극단적이다.
무색무취 아니면 아주 자극적이거나 둘 중 하나다. 중간도 있겠지만 주로 양 극단에 위치한 영화가 주를 이룬다. 물론 내가 본 영화에 한해서 그렇다는 얘기다. 나도 SF, 스릴러, 액션을 좋아하면서 잔잔하다 못해 밍밍한 영화도 즐긴다. 묘하게 그만의 맛이 있다. 그중에서 일본 영화만의 매력이 있다. 총칼이 난무하고 화면에 피가 튀는 영화가 주는 카타르시스 사이에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슬로 푸드 성격의 영화도 있어야 한다. 뷔페에 가서 고기만 먹지 않고 김치를 중간에 먹어줘야 롱런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빔 벤더스 감독, 야쿠쇼 코지 주연의 퍼펙트 데이즈(2023)는 그런 ABC주스 같은 영화다.
영화는 2시간을 살짝 넘는 러닝타임이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외계인에게서 지구를 구하고도 남고, 악랄한 테러리스트로부터 무고한 수많은 시민을 지키기에도 충분하다. 하지만 퍼펙트 데이즈는 2시간 동안 도쿄 시부야의 화장실 청소부인 '히라야마'의 일상만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아주 약간 삶의 변화와 작은 일이 생기곤 하지만 2시간 동안 관객으로서 지켜보는 것은 이 사연 많아 보이는 노년의 화장실 청소부의 일상이다. 그럼 분명 지겨워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의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되는 히라야마의 일상은 반복 그 자체다. 소박한 다다미 2층 방에서 새벽에 눈을 뜨고, 이불을 동일하게 접고, 화초에 물뿌리개를 물을 뿌린다. 청소용 작업복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가 차키, 동전, 청소용 공구열쇠꾸러미 등을 챙긴 뒤, 문을 열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문 밖을 나선다. 작은 자판기에서 BOSS 캔커피를 하나 뽑아 들고, 키로 차 문을 연 뒤, 한 모금 마시고 차의 시동을 건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도쿄의 도심을 달려 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한다. 중간에 신사에 들리거나 삼각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먹고, 쉬는 날에는 목욕탕을 가거나 작업복을 빨래방에 가서 세탁한다. 낡은 지하도 노포에서 식사를 하고, 가끔 들리는 식당에서 가벼운 술이나 저녁을 먹는다. 이게 전부다. 영화 속에는 조카 '니코'가 찾아오고, (BOSS 캔커피를 2개 뽑는다), 젊은 동료인 타카시와 카세트테이프와 관련된 일이 생기거나, 그림자밟기 놀이 정도를 하는 것이 전부다. 물론, 이 작은 일상의 변화들은 나름 의미를 가진다. 영화는 고요한 일상의 반복 속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에게 물어온다. 영화 속 '히라야마'는 낡은 필름카메라로 가끔 햇살을 찍는다. 그것도 렌즈에 눈을 가져다 대지 않고, 눈대중으로 카메라를 하늘로 향해서 셔터를 누른다. 지금 내 눈으로 보는 찰나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필름을 현상해서 나온 사진들은 흔들리거나 의도와 다르게 나온 것은 찢고 나머지는 날짜 별로 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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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햇살의 반짝임을 의미하는 일본어.
주인공 '히라야마'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웬일인지 한 번 촬영된 코모레비는 흑백사진으로 인화하며,
한 번의 기록(기억)은 다시 못 나올 것 같은 틴 케이스에 보관되어 벽장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반복되는 삶에 몸서리친다.
매일 아침 일어나고, 학교나 회사를 간다. 정해진 패턴과 반복되는 일과는 마치 감옥 같은 삶이라 부정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일상을 벗어나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잠깐의 탈옥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삶은 그만의 세상이 있다. 영화 속 대사도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세상이 있다. 우리는 각자의 삶과 우주의 중간에 서 있다. 그 자리에서는 다른 삶도 보인다. 화장실 앞 언덕에는 등에 나뭇가지를 짊어진 노숙자 할아버지, 엄마를 피해 화장실에 숨어들었던 이름 모를 아이와 그 엄마, 점심시간에 홀로 벤치에 앉아 다소곳이 샌드위치를 먹던 젊은 여자, 타카시의 애정공세를 10중 3 정도의 확률로 거부한 아야, 히라야마의 조카 니코, 이혼한 전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 주점 여주인의 전남편처럼 모두 각자의 세상에서 서로를 바라볼 뿐이다. 가끔 그 세상이 겹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만의 우주와 세상이 있는 법이다.
반복되는 삶이 지겹고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소중한 하나의 세상이다. 그 세상에는 하릴없이 흔들리는 눈부신 햇살이 있다.
히라야마는 하루에 2번 하늘을 올려봤다.
한 번은 새벽에 일을 나갈 때 작은 집문을 여는 순간이고, 또 한 번은 짧고 소박한 점심식사 시간 이후다. 그는 그 짧은 순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얼마나 소중했을까. 또는 그 반대였을까? 영화 속에서 그가 선택한 화장실 청소부로서의 세상은 그의 선택이었다. 부유해 보이는 그의 여동생과 아버지에 대한 대사로 볼 때, 부유하고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지금의 세상을 선택한 어떤 이유가 있어 보였다. 잠시라도 함께 시간을 보냈던 - 못 본 사이에 엄청 커진 - 조카 니코와 그의 엄마이자 여동생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흐느끼는 히라야마의 모습에서는 그가 선택해서 자의로 속한 세상은 수도에 가까웠다. 최소한의 소유, 관계와 함께 작은 화분에 물을 주는 행위, 오래된 스탠드 불빛 아래서 읽는 책 한 권과 안경. 그는 어쩌면 본인에게 주어진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도 멀리서 보면 거의 동일한 패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눈을 뜨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지나고 보면 그렇게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삶일 수 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다툼과 갈등, 오해와 불신, 괴로움 등에 묻혀, 일렁이는 나뭇잎 사이의 빛나는 햇살을 못 보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도쿄의 멋진 공중화장실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시작이 도쿄 시부야 구(區)의 17개 공중화장실 홍보프로젝트인 'THE TOKYO TOILET PROJECT' 였다고 하니 그 목적도 충분히 달성한 듯하다. 디자이너의 입장에서 모두 한 번 정도는 보고 싶을 정도다. 영화 중에 한 외국인이 투명한 화장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묻고, 히라야마가 말없이 안에 들어가서 문을 잠가서 투명한 화장실이 불투명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 장면은 원래 영화목적에 가깝다. 직업에 대한 태도를 상징하는 히라야마가 청소를 대하는 태도는 깔끔하고 세련된 공중화장실 디자인과 잘 어우러졌다. 수동적인 것 같아도 반사경을 이용한 청소의 디테일,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청소행위 등은 그것 자체로 히라야마가 삶을 대하는 태도같이 보였다.
한편 주연을 맡은 히라야마 역의 일본 국민배우 야구쇼 코지는 이 영화로 2023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는 영화 내내 별다른 대사 없이 행동으로 주인공 '히라야마'의 세계를 잘 표현해 냈다. 체화된 삶의 패턴과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표정 연기는 대사 없는 장면에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마지막 롱테이크에서 그의 표정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영화 내내 드러났던 그의 세상과 주변인들, 내가 볼 때는 그의 잔잔한 삶에도 약간의 포인트가 있었던 주점 여주인 전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약간의 인간성이 살아난 것은 아닐까 했다. 절제된 그의 삶에서 캔맥주 3개와 피우지도 않던 담배와 라이터는 그에 대한 반증인 듯했다. 다 마시지 않은 캔맥주 안에 담배꽁초를 비벼 넣어 꺼버린 것도 히라야마가 살아있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우리의 세상에는 크고 작은 겹침과 사건이 생긴다.
영화 퍼퍽트 데이즈는 마치 평양냉면 같다.
슴슴한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지만 그 경지까지 가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한두 번의 경험이 쌓이다 보면 그 고유의 맛이 생각나는 법이다. 맵고 자극적인 맛 사이에 슴슴한 깊은 맛이 미식생활을 풍부하게 하듯, 명상 같은 영화는 삶의 속도와 생각의 깊이를 풍부하게 만든다. 영화의 다양한 맛이며, 오늘 지금 이 순간 울면서도 웃게 되는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며 질문해 온다.
"당신의 하루는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