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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 오전반에는 묘한 기운이 있다

by 송기연

운동 종목은 '크로스핏'으로 정했다.

이제 가장 큰 문제는 언제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이건 철저한 메타인지의 영역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할 일을 뒤로 미뤄야 하는 정당성을 찾는데 귀재다. 나 역시 그렇다. 하루 중에서 운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 정당한 핑계가 발생하지 못하는 ('안' 하는것이 아니다) 때는 언제일까? 보통은 일과를 마치고 운동을 한 뒤 하루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적기는 했지만 학교나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저녁에 운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못 한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니 못 하는 수 백가지의 이유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저녁에 급한 약속도 생기고,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집에 일이 생기거나 하는 온갖 이유가 머릿속에 바로 떠올랐다. 역시, 나름 나는 메타인지가 있긴 한 모양이다. 게다가 나는 중년의 아저씨 아닌가. 사람은 누구나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에너지의 총량은 나이가 들수록 적어지고, 배터리가 소진되는 속도 역시 빨라진다. 스마트폰을 생각해 보면 그럴듯하지 않은가? 처음 폰을 샀을 때는 며칠이라도 버텨줄 것 같았는데 2년만 지나면 완충을 해도 보조배터리나 충전케이블이 없으면 하루를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오전 첫 시간을 선택했다! 출구전략 따위는 아예 없애니 왠지 스스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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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핏은 오전 9시가 첫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직장인이 오기 어렵다. 보통은 자영업자이거나 나처럼 시간조절이 유연한 사람들의 시간대다. 그러다 보니 연령대도 아주 젊은 학생들은 방학을 제외하곤 보기 어렵다. 그래서 고정멤버들이 많은가 보다. 이 시간대에 운동을 하니, 둘 중 하나였다. 초반 1년 정도는 정신력의 싸움이었다. 제대한 지 30년이 살짝 넘었는데, 군대에서 경험한 유격훈련 후 겪었던 후덜 거림과 함께 했다. 특히 하체 프로그램이 있는 날에는 운동을 하고 나면 하루 에너지, 아니 다음날 에너지까지 끌어다 쓴 기분이 들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니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오전반은 9시와 10시 30분 총 2개의 시간이다. 이 중에서 9시에 운동을 하면 10시에 마치고, 샤워를 하고 나오면 10시 30분이다. 말이 나왔으니, 운동 후에는 온몸이 땀에 젖는다. 그런데 요즘 젊은 MZ들은 박스에서 샤워를 하지 않았다! 공용으로 씻는 공간보다는 집에 가서 씻는다고 했다. 역시 젊으면 땀 냄새도 많이 나지 않는다. 나도 그 나이를 지나왔지만, 아저씨들은 그렇게 했다가는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몸을 자주, 더 깨끗하게 하려고 더 노력해야 한다. 하루 에너지 총량과 함께 아저씨 몸에서 분비되는 모든 것들의 성질이 고약해지는 것은 자연의 섭리 같다. 아무튼.


9시 반은 조금 여유가 있다.

하루를 여는 첫 타임이라 적당한 느긋함이 있다. 그렇지만 체력적으로 든든한 준비를 해야겠기에 평일에는 저녁에 과음을 하거나 밤샘 작업을 하는 일은 줄었다. 지금은 조금 교만하게도 약간의 체력이 받쳐주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에서 술도 한 잔씩 하지만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다음 날 아침 운동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두 번은 다음 날 운동에 영향이 있을 정도로의 회식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특히, 유산소 프로그램이라도 있는 날이면 아주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아주 건전한 평일 저녁시간을 보내는 덤도 얻었다.


그렇다고 9시 반이 운동에 소홀한 것은 아니다.

보통 프로그램의 구성은 근력운동(Strength)과 WOD다. 한 번씩은 지옥 프로그램이라고 명명해서 근력운동의 양이나 횟수를 2배로 늘린다. 명목상으로는 인간개조, 프로그램 출전용이라고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재미다. 조금씩 들 수 있는 무게를 늘리고, 횟수를 늘려가는 것이 재미다. 물론, 나는 젊은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하지 못하기에 '생활체육'이라고 부른다. 자칫 다치거나 하면 그대로 운동을 멀리 할 것 같기도 하고, 다칠 수준까지 투쟁심을 키울만한 성정도 안된다. 여자 Rxd 면 충분하다. (Rxd는 as prescribed의 약자로 '처방된 대로'라는 의미다. 코치나 프로그램이 제시한 무게, 횟수, 세트 수를 의미한다. 이와 함께 Scale이 있어서 자기 신체나 그날의 컨디션에 맞게 이를 조절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같은 수준에서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


농담 삼아 9시 반은 산스장(산속 헬스장) 같다.

어슬렁 거리면서도 운동에는 진심이다. 동료 간 친분으로 농담도 하지만 누구 하나 운동이 시작되면 아주 적극적이다. 앞으로 한 명씩 소개할 멤버들은 개성도 강하고 캐릭터도 좋다. 나이나 직업을 막론하고 배울 점도 많고 운동 이외에 생각할 인사이트를 많이 주고받는다. 이런 점이 9시 반의 매력이다. 가끔 일정이 안 맞을 때는 오후나 저녁 시간에도 운동을 했었지만, 오전 9시 반만 못했다. 그리고, 그런 9시 반의 중심에는 쭌코가 있다. 박영준 코치인데, 이 분도 크로스핏 코치를 하고 있지만 팔방미인이다. 손재주도 좋고, 세상 많은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재미있는 캐릭터다. 운동 이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나와도 계획 중이다. 아, 그리고 크로스핏 회원과 결혼을 한 아직은 새신랑인데 커플로 운동하는 멤버들도 많다. 아무래도 힘든 운동을 같이 하고 나면 우정 못지않은 애정도 함께 쌓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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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하는 운동은 고독하다.

철저한 계획과 자기 관리가 안되면 운동효과를 보기 어렵다. 나는 그렇지 못하는 것을 잘 알기에 이 단체 프로그램의 맛이 있는 크로스핏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주효했다. 정해진 시간에 몸을 일으켜서 기계적으로 박스에만 가면, 코치의 주도로 동료들과 운동한다. 내가 운동 프로그램을 짤 필요도 없고, 의지나 계획이 없어도 그냥 가서 몸 풀고, 근력 하고, WOD를 하면 된다. 같이 힘든 운동을 하는 동료들과는 나이, 직업, 성격을 떠나 친구가 된다(조카나 자식뻘도 있어서 나는 그냥 남녀 가리지 않고 '큰 형님'으로 불린다). 내가 어딜 가서 이런 경험을 쌓을 것이란 말인가. 그냥 감사할 따름이다.


운동을 하면 건강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얼마나 효율적으로 재미있게 지속할 수 있느냐는 개인의지보다는 외부 프로그램의 영향이 필요하다. 의지가 아주 강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래서 개인 PT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건 비용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크로스핏은 아주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하다 보면 요령도 생기고 재미도 있으며 무엇보다 성격개조가 잘 된다. 내가 앞으로도 큰 인생의 변화가 없으면 크로스핏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운동을 통한 건강한 신체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와 거기에서 얻는 에너지 덕분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떨어지고, 몸은 엉망이 되고 짜증과 간섭만 늘어난다. 활기찬 에너지보다는 불평과 고집만 늘어가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여기에 활기찬 운동 하나를 정하면 삶이 달라진다. 나는 헬스가 체질이나 성격에 안 맞았지만 맞는 사람도 있지 않겠나. 요즘 유행하는 달리기, 배드민턴, 수영, 축구, 야구 등 자기와 인연이 되는 운동 하나를 정해서 나름의 재미를 찾아야 한다.


살기 위해 운동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젊을수록 이 말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밈일 뿐이다. 원래는 운동하면서 체중도 줄였으면 했다. 한동안은 체중이 줄어들다가 다시 원래 몸무게를 넘었다. 짐작컨대 지방은 조금 줄었고 근육량이 늘어났을 거라는 희망찬 착각을 해본다.



운동도 궁합이 맞아야 한다.

나는 크로스핏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그냥 ET나 거미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운동 덕분에 그렇게 되는 것은 예상보다는 조금 뒤로 미룰 수 있게 되었다. 9시 오전반의 편한 분위기는 크로스핏에 취미를 붙이게 하면서,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활기찬 삶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여름에는 땀도 많이 나니 운동하는 멋도 났다. 가을은 또 나름대로 선선해서 운동하기 좋다. 오늘은 새롭게 오전반 신규회원이 등록했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9시 반에 등록했다가 사라졌다. 조금씩 새로운 멤버들이 오면 내 기억을 떠올리면서 조금은 편하게 해주려고 한다. 모든 신규회원은 두 번째 날이 가장 중요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천근만근일 것이다. 하지만, 이걸 버텨내고 몸을 일으켜서 9시까지 박스에 오기만 하면 된다.


9시 반은 그런 묘한 기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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