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내 얘기는 아니다.
운동을 하다 보면 평소 내 삶의 궤적에서는 보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오늘 소개할 B가 딱 그렇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겠지만 크로스핏은 특히 테토남, 테토녀들의 집합체 같다. 나 같은 사람과는 다르게 운동을 하는 주요 구성원들을 보면 에너지가 좋다 못해 흘러넘친다. 에너지 덩어리 그 자체 같다. I성향의 사람들은 기 빨리겠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활기찬 기운을 조금이라도 얻어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내가 크로스핏을 하면서 얻어가는 중요한 가치 중 하나다.
보통, 고정관념은 나쁘게 표현된다.
특에 박힌 생각이 창의적 발상을 어렵게 하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고정관념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오히려 어느 정도 장착된 고정관념은 매 번, 매 순간 판단하거나 선택해야 하는 수고를 줄여준다. 모르는 사람에게 거리감을 두고, 어둠에는 위협이 느껴지는 등의 고정관념은 생존이나 삶에 이익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고정된 관념이 여럿 있다.
함께 크로스핏을 하는 B에게는 내가 가진 특정한 고정관념을 쉽게 적용시킬만했다. 해병대 출신, 짧고 노란 헤어, 몸에 있는 큰 문신, 엄청난 힘과 파이팅, 낯을 가리지 않는 외향적 성격 등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없이도 B를 특정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외적으로 보이는 B는 테토남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내 주위에는 B 같은 캐릭터의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 삶에서 마주하는 B는 수컷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내였다.
여기에 B는 인사성이 참 좋다.
누구와도 예상보다 훨씬 큰 목소리로 인사한다. 자칫 처지기 좋은 아침시간을 화들짝 깨어나게 만들어 준다. 이 친구는 어디서 뭘 먹길래 이런 파이팅이 아침부터 나올까? 하지만 B의 이런 행동은 늘 내 예상 안에 있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올해 어느 날도 어김없이 B는 아침에 나에게 와서 큰 소리로 인사한 뒤,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형님, 인생에서 매력 있는 사람은 뭘 해야 됩니까?
작용 반작용의 법칙.
모든 물질세계에는 이 법칙이 적용된다. 하지만 사람은 좀 다르다. 평소 예상치 못한 작용에는 반작용이 얼른 일어나지 못한다. 평소 임기응변 같은 대처는 나름 좋다고 생각했지만, B의 질문에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평소 B와 나의 예상 대화목록에는 존재하지 않던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후 말없이 머뭇거리던 나에게 B는 2차 질문 어퍼컷을 던졌다.
"저는 형님을 보면서, 매력적인 사람은 무엇인가, 삶을 무엇인가를 늘 생각합니다."
카운터 펀치를 맞고 나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평소에도 B는 연장자인 나에게 듣기 좋은 말을 많이 해준다. 귀에 좋은 말에 약해지는 것이 사람이다. 연속된 질문 뒤에 조금 얘기를 나눴다. 운동 시간이 다 되어가서 깊은 얘기를 나눌 순 없었지만 짧은 시간 B와 나눈 대화는 내 고정관념의 성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B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바쁜 삶에서 그는 늘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한다고 했다(B는 고깃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그리고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B가 선택한 방법은 독서와 여행이었다. 이제는 대놓고 B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그의 말과 행동에서 짐작했던 고정관념과 실제 B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역시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아직 멀고 멀었다.
이후 나는 B에게 『미학적 인간으로 살아가기(최광진)』을 선물했다.
내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사람의 조건을 미학적 관점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내가 선물한 책을 B가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에게는 계속 질문과 답을 찾는 과정을 탐색 중인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은 삭발을 했다가 또 어떤 날은 노랗게 염색을 하고 온다. 느닷없이 해외로 혼자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미라클 모닝으로 매일 새벽마다 10km 이상을 달리기도 한다.
B는 늘 새롭다.
운동뿐만 아니라 운영하는 가게의 방식, 손님 대응과 그에서 오는 자신만의 철학 등. 내가 가진 모든 고정관념은 바사삭 무너졌다. B는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진 조르바 같은 자유인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는 게 몸이 건강하려면 힘들게 운동해야 한다. 요령은 없다. 그래서,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 정신도 함께 건강할 것이다(이것도 고정관념이려나). 앞에서 말한 B는 남자라면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신체적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생각의 힘까지 더하고 있다. 크로스핏을 하면서 알게 되는 다양한 캐릭터의 인물들은 나에게 나름의 영감을 준다. 나이를 떠나서 배우고자 하는 자세는 아름답다. 아, 이것도 B의 말이다! 그러고 보니, B는 나름(?) 괜찮은 명언 제조기다.
테토남은 매력적이다.
여기에 생각의 깊이까지 있다면 그 매력의 정도는 폭발적일 것이다. 부지런해야 운동도 하고 지식과 사고의 깊이도 키울 수 있다. 운동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일단 몸이 건강해야 뭐라도 할 엄두를 낸다. 의지가 약한 게 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의 문제일 수 있다. 운동이 가장 비효율적이지만 가장 신뢰 있는 방법이다. 요 며칠은 B가 아침시간에 보이지 않았다. 아마 뭔가를 또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조만간 B를 만나게 되면 물어볼 생각이다. 옆에서 지켜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넘치게 하는 B다. 기대된다.
제대로 뇌가 섹시한 테토남, B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