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에 감사합니다

by 고미젤리

아침을 먹고 냉장고에 남은 반찬을 넣다 하필 김치가 담긴 그릇을 떨어뜨렸다. 냉장고 칸 칸마다 김치가 빨래처럼 걸리는 걸로는 모자라, 바닥에 빨간 국물을 쫙 퍼트리며 쨍그랑 떨어진다. 이런 광경을 묘사하는 말이 ‘처참하다’일까? 진짜 시간을 몇 초 전으로 되돌려 떨어지는 그릇을 잡아채고 싶다.


사실 이 일이 오늘의 첫 참사가 아니다. 눈을 뜨자마자 화장실에 가면서 뭔가 물컹한 것을 밟았다. 무언지 짐작이 가서 정신이 확 깬다. 강아지 똥이다. 아무리 귀찮아도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꼭 데리고 나가는데도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꼭 집에서 사고를 친다. 그 스트레스라는 게 별 것도 아니다. 목욕을 정말 싫어하는 녀석이 일주일에 한 번 겨우 하는 목욕 날이면 꼭 집 안 한 가운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어제는 목욕 후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다 싶었는데, 뒤늦게 복수극을 펼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쓸고 닦고 청소를 두 번이나 했다. 내친김에 냉장고 선반도 다 꺼내 닦고, 식탁 의자도 모두 들어 올려 물걸레질도 빡빡했다. 씩씩대며 청소하는 와중에 강아지는 새근새근 잘만 잔다.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떠올리는 날이 있다.


4학년 때였다. 자전거를 배운다고 비틀대다 넘어져서 동네 복덕방 유리창을 깨 버렸다. 내 뒤에서 자전거를 밀어주던 친구들은 모두 도망가고, 나는 복덕방 할아버지에게 귀를 잡혀 가게 안으로 끌려갔다.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길 한복판에서 넘어진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를 넘어뜨리고 그 옆을 또 넘어뜨리고 하면서 도미노처럼 쓰러지더니 마지막으로 그 복덕방 통유리를 와장창 깨뜨렸다.


바둑을 두던 할아버지들은 끌끌 대며 어쩌다 이런 일을 저질렀냐고 한 마디씩 하신다. 흥분한 복덕방 할아버지는 나를 다그치고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11년 세월에 이런 굴욕적인 일은 처음이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 울고 있는데, 콧물 좀 닦겠다고 손을 내리면 여지없이 호통을 치셨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다행히 한 아저씨가 나를 알아보고 저쪽 양복점 셋째 딸이라고 신분 확인을 해주었다. 할아버지는 좀 있다 우리 집으로 직접 가겠다며, 나보고 엄마에게 미리 말해두라고 하신다. 엄마에게 알려지다니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결국 나는 이 참에 가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있으나 마나 한 셋째 딸, 입이 하나 줄었다고 좋아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셋째로서 얼마나 서러운 일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어릴 때 사람들이 집에 오면 항상 첫째가 예쁘다, 둘째가 예쁘다 하며 입씨름을 했다. 애써 무시해보려 하지만 나를 거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때 항상 아빠가 내 눈치를 살피며 셋째가 제일 예쁘다는 둥, 선도 안 보고 데려갈 애라는 둥,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는 둥, 뻔한 이야기를 하셨다. 그런 이야기들도 싫지만, 미안한 얼굴로 웃는 사람들은 더 싫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식 넷은 너무 많다. 첫째 둘째는 예쁘니까 사랑받으며 살면 되겠고, 막내아들은 집안의 기둥이라고 하니 놔두고, 남은 건 깍두기 인생인 주제에 사고도 잘 치는 나밖에 없다.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내가 없어져 주겠다는 희생정신이 불타오른다. 생각할수록 더욱 서러워져 나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또 한참을 울었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 같지도 않은 계획을 세워 보았다. 먼저 이름을 좀 바꿔야겠다. 흔하지 않은 이름이긴 하지만 성과 같이 부르자면 발음이 좀 어렵다. 가족과의 이별의 의미로 성만 바꾸기로 결심한다. 이제 눈물도 좀 말랐고,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본다. 집에 가서 옷을 챙겨 와야 할까? 편지라도 남겨둬야 할까? 돈은 어디서 구할까? 내 발로 고아원으로 걸어 들어갈까? 제법 심각하게 생각하다 보니 왠지 그럴듯하게 느껴지면서, 나중에 성공해 돌아와 엄마 아빠 앞에서 떵떵 거리는 꿈까지 꾸게 되었다.

그렇게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엄마와 언니가 갑자기 나타났다. 시장에 다녀오는 길인 것 같은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있다. 나의 심각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엄마가 내 입에도 하나 넣어주었다. 그 달콤한 맛이라니. 나는 좀 전의 그 상상은 다 잊고 엄마 손을 잡고 깡총대며 집에 돌아왔다.


며칠 뒤 사건 현장을 지나다 보니 새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나는 괜히 자세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후다닥 발걸음을 빨리 했다. 혹시라도 저 심술궂은 할아버지가 내 귀를 잡고 끌고 갈 거 같아 다리가 후들댔다. 그 후로도 계속 나는 그 앞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돌아다녔다. 신기하게도 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아빠가 위험하니 자전거를 운동장에서 타라고 이야기해 줘서 뜨끔했던 기억만 남았다.




그때 가출하지 않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애도 다 키우고, 오늘처럼 김치도 한 번 휘날려주고 강아지 똥도 밟고 하는 날이 왔다. 좀 사소하지만 짜증 나는 일이 생길 때마다 4학년 그날의 결의에 찬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깨진 유리창은 갈아 끼면 되는 거고, 잘못한 일은 손을 싹싹 빌면 되는 일이다. 덕분에 그날 잊을 수 없는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먹었고, 덕분에 오늘 냉장고 대청소도 했다. 집에서 시원하게 배변한 강아지 산책은 한 번 건너뛸 수도 있게 되었다.

나쁜 일이 생겨도 시간이 좀 지나고 보면 그날 내가 보지 못했던 사소한 행운들이 주위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세월의 흐름이 우리에게 주는 위안이다. 오늘 일은 세월이 해결해 줄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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