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집 앞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언제부터 마당에 나와 계셨는지 멀리서부터 나를 반기신다.
할: "아이구~ 우리 똥강아지 왔누?"
백: "헤헤 할머니 잘 있었지? 뭘 또 나와계셨대"
할: "아이구~내 새끼 얼굴이 홀쭉해졌네."
오랜만에 보는 할머니의 얼굴이 밝아 보여 안도감이 들었다. 항상 집에 혼자 계신 걸 생각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이도 정정하신 모습에 이제는 나도 웃을 수가 있었다. 오는 길에 샀던 박하사탕과 믹스커피를 꺼내놓았다.
백: "다 잡수시거든 또 사 잡숴 알았지? 이건 얼마 안 돼요. 용돈 헤헤"
할: "잔뜩 있는디 뭘 사왔디야 돈도 없으매."
백: "네? 잔뜩 있어?"
할: "이 있잖여 그 누구냐. 이 옛날에 너 데리고 내려온 양반."
그동안 정신없어서 잊고 있던 국정원아버지 친구분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거나 비상시에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던 게 생각난다. 집에 들어가 보니 쌀이며, 반찬이며 여러 흔적들이 보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해주시는 것 같아 면목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한참이 흘렀거늘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었다. 역시 남자들의 세계란 이런 건가.
백: "이걸 다 가져다주셨어?"
할: "암만, 그 밑에 쫄다구라나 가끔씩 실어 나르네."
할: "아이구 미안해서 어쩔껴."
백: "내가 나중에 다 갚을 거니깐 걱정 말고 잘 챙겨 잡숴. 알았지?"
가끔은 이 세상에 할머니와 단둘이 남겨진 현실이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이제야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는있다지만 내가 생각해도 아직 애송이 같다. 가끔은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전역을 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연애나 결혼도 나에게는 점점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소연이를 잡지 못했나 보다. 할머니 마저 세상을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될 텐데, 한없이 초라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어쩌면 할머니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독백)"오래 사셔야 할 텐데..."
그날밤 나는 베개를 들고 할머니 옆자리에 누웠다.
백: "오랜만에 할머니랑 같이 자야지 헤헤."
할: "우리 똥강아지 힘들지?"
백: "힘들긴~ 내가 군대에서는 엄청 높은 사람이야~ 내 말 한마디면 다들 끔뻑한다니깐~"
할: "아이구 내 새끼가 아주 멋지구먼?"
백: "그럼. 다들 내 눈치 보느라고 난리지~ 제까지 것들이하하."
나는 허세 아닌허세를 부리며 할머니를 안심시키려고 떠들어댔다. 그걸 듣던 할머니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불을 꺼서 보이지 않았지만 내 눈에서는 이유 없이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마음은 편안했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한참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유일한 소원이 있다면 그건 할머니와 오래오래 함께 사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소주 한 병을 사들고 부모님을 뵈러 갔다. 그날 교통사고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가시질 않았는지 꿈에 찾아오곤 한다. 유골함의 빛바랜 사진 속에 우리 가족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쯤 정적을 깨우는 전화벨이 울렸다. 황중사였다.
황: "중대장님 휴가는 잘 보내고 계십니까? 전화 한 통도 안 주시고 섭섭합니다. 하하"
나는 하루 남은 황금 같은 휴가를 슬프게도 황중사와 소주 한잔으로 마무리할 계획이다. 눈에서 멀어지는 내 뒷모습을 보며, 한 손으로는 손을 흔들고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시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