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가족의 첫 질문
도시의 시곗바늘은 늘 재빠르게 움직였다.
자동차는 끊임없이 경적을 울리고, 지하철은 초마다 사람을 삼켰다.
모든 것이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바쁘지 않은 존재가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비둘기들이었다.
그들은 유유히 도시를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높은 빌딩 사이를 가르며,
때로는 낮게 날아 도시의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켰다.
“으—악!”
낮게 날던 비둘기 한 마리가 머리 위를 지나가자
깔끔한 정장을 입은 여자들이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가방으로 머리를 감싸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비둘기, 이름은 두리였다.
두리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난 1988년 평화의 비둘기가 우리 증조할아버지라고!
그때는 나라 대표 포스터에 우리 얼굴이 크게 박혔는데…
왜 요즘은 다들 나만 보면 도망가?”
씁쓸함을 안고 공원 속 비둘기 가족 무리로 들어간 두리.
오늘도 가족들은 모여 서로의 깃털을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소피오스'
고대 철학 40년 경력. ‘절제’와 ‘덕’을 입에 달고 사는 현명한 비둘기다
할아버지 '아퀴비둘'
중세 철학에 심취. 늘 “은총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코를 훌쩍인다.
아빠 ‘달빛(에피스테미)’
근대 철학 전공. 합리적 분석과 비판을 즐긴다.
엄마 ‘새벽(로고스)’
경험적 사고에 밝고 논리적인 성격. 항상 가족의 중심에 선다
막내 ‘누리(네오)’
현대 철학을 공부하는 어린 비둘기.
“관점, 존재, 관계”를 입에 달고 사는 신세대 비둘기다.
그리고 이 모든 철학자 가족 사이를 오가며
가장 활발히 도시를 누비는 비둘기,
그게 바로 나 두리다.
나는 정보를 모으고 질문을 느끼고 움직임을 만드는 비둘기 이야기 꾼이다.
“두리야, 먹을 것 좀 찾았느냐?”
제일 나이 많은 증조할아버지 소피오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예전에 늘 밥 주던 그 할아버지도 일주일 넘게 안 보여요.”
소피오스는 깊은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봤다.
“그래… 그 할아버지 우리한테 밥 줬다가
경찰이 사진 찍으며 뭐라고 뭐라고 하더구나.
‘비둘기에게 먹이 주면 벌금 10만 원’이라나.”
막내 비둘기 누리가 작은 날개를 접고 말했다.
“오늘도… 아무것도 못 먹는 거야?”
부모 비둘기 새벽과 달빛도 한숨을 내쉬었다.
도시는 넓지만, 먹이는 사람들의 손길에 달려 있었고
요즘 그 손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엄마, 어떤 아저씨가 그랬어. 이제 우리한테 먹이 주면 벌금이래.”
누리가 말했다.
달빛도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요즘 인간들은 우리를 ‘유해동물’이라 부르지.”
그 말의 비둘기 주변을 맴돌았다.
다음날,
비둘기 집안의 4대 철학 가족 회의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먼저 고대 철학의 자존심, 증조할아버지 소피오스가 말했다.
“음… 인간들은 늘 풍요 속에서 사는데
우린 왜 이렇게 쪼들리는 걸까?
고대 철학에서는 ‘절제’가 중요한 덕목이라 했지만…
먹을 게 없으면 절제란 것도 사치지.”
그 아래에서 중세 철학의 신봉자, 할아버지 아퀴비둘이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은총이 내린다고 하면서
동시에 벌금 딱지를 붙이다니…
은총과 벌금 사이에서 진리는 어디 있단 말인가?”
근대 철학을 공부한 엄마 아빠 비둘기,
새벽(로고스)과 달빛(에피스테미)도 날개를 털며 불만을 터뜨렸다.
“정책이란 건 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요?”
새벽이 말했다.
“우린 거리의 빵부스러기를 찾아다니지만,
우리의 존재를 규정하는 법은 알 수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져요.”
달빛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힘 있는 자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우리가 평화의 상징이 되기도, 유해동물이 되기도 하는 거지.”
마지막으로 현대 철학을 공부하는 막내 누리(네오)가 말했다.
“결국 모든 문제는 ‘관점’이야.
인간들은 자기 시선에서 우리를 유해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선택권이 없어. 존재는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데…
우리에게 말할 기회라도 있어야지.”
가족의 말이 끝나자 두리가 힘있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모인 거구나?.
이 모순된 세상을 그냥 둘 수는 없어서?.
이젠 우리도 세상에 ‘질문’을 시작해야 겠네요.”
소피오스가 천천히 날개를 펼쳤다.
“질문을 하려면,
먼저 정책을 만드는 곳으로 가야겠구나.”
누리가 물었다.
“그게… 어디죠?”
엄마 비둘기 '달빛'이 멀리 둥근 돔 형태의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기다. 사람들이 ‘정책’과 ‘법’을 만든다는 곳…
국회의사당.”
중세 철학자 아퀴비둘이 꼬리를 말며 중얼거렸다.
“유해하다는 건 결국 ‘누가 판단하느냐’에 달렸지.
사람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면
그들 눈에는 우리가 ‘악’이 되는 법이다.”
소피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우리가 직접 가서 물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 유해한지,
아니면 이 도시가 우리를 그렇게 부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바람이 살짝 불어와 가족의 깃털을 스쳤다.
네 마리 비둘기는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이를 찾아 도시를 날던 그들이,
이제는 질문을 찾아 도시를 날아갈 차례였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목적지는
푸른 돔이 빛나는 국회의사당이었다.
이 동화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철학의 흐름을
비둘기 한 가족에게 담아냈습니다.
어른 독자에게는 철학적 사유의 뿌리를 떠올리게 하고,
어린이 독자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열어줍니다.
먹이를 찾아 날던 작은 비둘기들이
이제는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과연 또 어떤 질문이 우리를 멈춰 세우고
생각하게 만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