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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빵점 엄마

자기 세상 위주인 아이가 엄마의 진심을 만날 때

"기찬아, 운동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그림도 참 잘 그리네! 

 여기, 하늘을 두가지색으로 표현하면 더 멋질 거 같아!"


선생님 칭찬에 우리 반 아이들의 엉덩이가 일제히 움직입니다. 


"우와! 멋지다!"


주변에 친구들은 나를 부러운 듯 쳐다봅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인 기찬이는 무엇이든지 잘하는 멋진 사람이 된 거 같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준비물을 챙겨주지 않아 옆의 친구에게 물감을 빌려야 합니다. 뿌듯함도 잠시 얼굴에 부끄러움이 밀려옵니다.


"소란아, 밝은 노란색 빌려줄래?"

"자, 여기 있어!"


역시 소란이는 착합니다. 소란이 엄마도 우리 엄마처럼 똑같이 일하는 소위 직장맘인데, 등교도 도와주고 저녁도 잘 챙겨준다고 합니다. 너무나 부럽습니다!. 우리 엄마도 소란이 엄마처럼 슈퍼우먼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친구의 물감을 빌려 간신히 그림을 완성하였고, 선생님은 교실 뒤 편에  우리들 작품을 걸어두십니다. 어디서나 제 그림이 눈에 띕니다. 부끄러웠던 마음이 자신감으로 다시 채워지네요.


수업을 마치면 저는 태권도장으로 갑니다. 엄마가 직장에 다니니 학원이 코스별로 이어집니다. 오늘 관장님은 다른 때보다 흥분되신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집중을 하라며 박수를 치며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자, 친구들! 이번 달에 단체 소풍을 갑니다. 관광버스를 2대 빌릴 예정이에요. 저녁 6시에 선착순으로 받을 거니 부모님께 꼭 신청하라고 말씀해주세요!"

"와! 진짜요?"

"일하시는 부모님들도 계셔서 문자로 단체 소풍 안내 오늘 오전 11시에 보냈어요!"


오랜만에 단체 소풍을 간다니 제 마음도 설레요. 아이들과 함께 놀이기구도 타고 동물체험도 할 거예요. 맛있는 점심도 친구들과 하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는 밤 8시에 오네요. 2시간 동안 신청이 마감되면 안 되는데 마음이 조마조마하네요. 엄마가 문자를 보면 알아서 신청해 주겠죠?


오늘도 태권도장,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보습학원을 돌다 보니 어느새 저녁 7시가 되었네요. 집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어요. 불 꺼진 방이 언제나 절 외롭게 하네요. 하지만 무엇보다 태권도 단체 소풍을 엄마가 예약했을까요? 베란다 창문을 내다보며 엄마가 오길 눈 빠지게 기다려 봅니다.  그런데 아직도 엄마는 나타날 기미가 조금도 안 보이네요.


8시가 넘으니 엄마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발걸음! 내 소망대로 엄마는 태권도 밴드에 댓글을 달았겠죠? 


현관문이 열립니다. 엄마는 들어오자마자 손을 씻으면서 오늘 어땠는지 물어봅니다.


"엄마! 태권도 밴드에 댓글 달았어?"

"어? 댓글! 그게 뭐야?"

"관장님이 아침에 문자 보냈대! 선착순으로 신청하는 거고, 댓글로 단체 소풍 신청한 아이들만 갈 수 있대!"

"어? 엄마는 문자 못 받았는데?"


엄마는 핸드폰을 열어 문자를 확인합니다. 그러더니 손가락이 빨라집니다.


"이상하네? 댓글이 달리지가 않아? 벌써 마감된 걸까?"


제 얼굴은 점점 더 열이 올라갑니다.


"왜? 벌써 마감된 거야?"


아! 망한 것 같은 이 불길한 예감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엄마는 태권도 관장님께 문자를 보내 좌초 지정을 묻습니다. 결론은 단체 소풍 게시글을 올린 지 30분 만에 댓글 80개가 달려 더 신청할 수 없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엄마는 역시나 저를 도와주지 못합니다


"미안해. 기찬아! 다음에는 문자를 꼭 확인하고 빠르게 신청할게"


엄마가 안타까워 하지만 위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됐어! 이런 적이 한두 번 이야지! 엄마는 날 잘 안 챙겨! 정말 나빠!"


난 받아쓰기를 보면 100점을 받는데, 엄마는 엄마 고시가 있으면 분명히 빵점을 받을 거 같습니다.

결국 그날 저는 울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녁도 먹지 않고 잠을 자서 그런지 한밤중에 눈이 떠졌습니다.

방안이 캄캄하니 제 등짝이 오싹해집니다. 하지만 저는 태권도 검은띠입니다. 국기원에서도 태권도 잘한다고 인증한 기찬이입니다. 눈을 비비고 식탁 위에 있던 초코파이가 생각이 납니다. 


'얼른 먹고 들어가야지! 엄마 아빠는 자고 있겠지?'


살금살금 발을 조심스레 디디며 거실로 나아갑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난 너무 억울해"


엄마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립니다.


"어린 기찬이를 집에다 홀로 두면서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나를 자를 수가 있어?"

"정말 화가 난다. 하지만 힘이 없잖아"


엄마가 우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 아빠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갑니다.


"일단 실업급여를 신청해보고, 차차 일할 곳을 알아보자. 그리고 부당해고 인지도 알아보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엄마 아빠가 꽤 심각해 보입니다.

덩달아 제 마음도 우울해지네요.


드디어 아침이네요. 다른 날보다 몸은 두배로 무겁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잔뜩 화난 분위기를 몸에 감고 아무 말 안 하고 거실로 나갑니다.

이 모습을 본 엄마는 식탁에 앉아 밥 먹으라고 손짓을 합니다.


오늘따라 엄마는 계란말이를 제 밥 위에 올려놓습니다. 


"우리 기찬이는 늘 열심히 해서 이뻐. 열심히 한 대로 보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어제 엄마가 태권도 단체 소풍 신청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눈을 마주치려고 엄마가 고개를 숙입니다. 엄마의 눈이 부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제 운 거 같습니다. 

무슨 일 때문일까요? 저보다 더 사랑한 회사를 엄마가 그만두게 되어서일까요?

엄마가 회사를 그만두면, 다른 엄마처럼 저를 잘 챙겨주실까요? 아니면 여전히 빵점 엄마처럼 그대로일까요?

일단 엄마의 결정을 존중해 드리려고 합니다.


아침 8시 30분이네요. 학교에 등교할 시간입니다. 엄마가 외투를 입고 제 책가방과 실내화 가방을 들어 현관에서 기다립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늦었다고 입구에서 안녕하고 뛰어가실 엄마인데, 여유로워 보이네요.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싫어! 나 혼자 갈 거야!"


엄마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누릅니다. 학교 앞까지 데려다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 서로 아무 말을 안 합니다. 


"기찬아! 엄마가 당분간 학교도 데려다주고 집에 오면 맛있는 밥도 챙겨줄게"


따뜻한 말이지만 왠지 엄마의 목소리가 슬퍼 보입니다. 학교 정문에서 엄마는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한참 바라봅니다. 고개를 돌리면,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실내화를 꺼내 드니 그제야 엄마가 등을 돌립니다. 집으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엄마의 발걸음이 예전처럼 씩씩했으면 좋겠습니다. 당분간 저는 엄마에게 백점 엄마가 되는 법을 물어물어 전하려고 합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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