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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선택을 하면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다가온다

by 선향

"뭘 해도 재미가 없어.”

동갑내기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 기분 안다. 나도 한동안 뭘 해도 재미가 없었으니까. 여행을 가도, 영화를 봐도, 사람을 만나도, 책을 읽어도 재미가 없는 상태. 그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는 저마다 달라도 내면의 에너지가 정체되고 고갈된 상태라는 것은 같다. 친구와 얘기해보니 한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전망을 잃은 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먹먹함과 방향을 잃은 듯한 막막함이 있었다.

고속도로 정체구간에 들어서서 끝없이 늘어선 차들을 바라보는 듯한 그 막막함은 어디에서 왔을까? 고속도로 정체구간은 가고 있는 목적지라도 분명한데 이 재미없는 인생의 정체구간에서는 내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이 막막함과 재미없음을 담담히 응시하자. 원인이 무엇일까? 재미없음은 내가 ‘안정’이라는 가치 하나를 얻기 위해 맞바꾼 ‘모험’의 대가는 아닐까? 친구는 무엇과 무엇을 맞바꾸었을까? 뭘 해도 재미가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의 미래를 더 이상 꿈꾸지 않는다. 우리는 마음 깊숙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더 나아진 자기 자신을 꿈꾸지 않는 자기에게.


천호에 살 때 주말에 가끔 산책 삼아 광진교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쉬지 않고 걸으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길이다. 항상 다리 위만 바쁘게 걸어갔다 오곤 했는데 하루는 이제껏 있는 줄도 몰랐던 다리 밑 공간을 방문했다. 교각 바로 아래에 전시와 공연을 위한 공간이 숨어 있었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발 아래로 시퍼렇게 흘러가는 강물이 보였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성큼 발을 내디뎌 유리 바닥 위로 올라섰지만 나는 바라보기만 해도 손바닥에 땀이 났다. 유리가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발을 내디디면 강물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아찔함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바닥을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며 안전함을 증명한 후 남편은 내 손을 붙잡아 주었다. 아래를 보지도 못하고 발을 내디뎠는데 발에 바닥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안심해서 비로소 발 밑 아래 흐르는 강물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살면서 무얼 해도 재미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은 지나치게 안전함을 추구해서 아예 모험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지나친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들만을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는 힘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 바닥이 거기 있다는 것을 믿고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용기가 없을 때 삶은 한없이 지루해진다.

십여 년전 옛 직장 동료였던 홍콩인 레베카가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서 만난 적이 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소호에 차린 자신의 옷가게에서 팔 옷과 장신구를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에서 사가려는 것이었다. 조그마한 몸집의 레베카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새벽 남대문시장을 헤매는 광경은 생각하면 눈물겨웠다. 한두 달 마다 한국에 와서 밤새워 물건을 사서 비행기를 타는 생활을 힘겨워 하면서도 레베카는 자신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회사를 그만 두기 전 옷가게를 차리려고 할 때 주변 가게 주인들이 왜 이런 블랙홀로 들어오려 하느냐고 말렸다고 했다. 그때 레베카는 '블랙홀을 직접 경험해봐야 블랙홀이 뭔지 알 수 있잖아.'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확고한 결의를 다졌다고 한다. 코칭에 관심이 많은 레베카의 남편 켄은 우리가 꼭 붙들어 잡고 매달려 있는 안정이란 것은 허상일 뿐이라고 하며 퍼즐 맞추기를 할 때는 퍼즐의 첫 조각을 떼는 조그만 변화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하면 예기치 않은 놀라움이 다가올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듣고 나는 당시 이직을 결심했다. 정체된 삶을 흘러가게 만들기 위해서는 용기 있게 한 발을 떼는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고 망설일 때 누군가가 잡아주는 손은 그토록 소중했다.


보따리장수, 그녀


블랙홀을 경험해봐야 블랙홀이 뭔지 알 수 있잖아,

통통 튀는 에너지, 그녀가 말했다

나는 고개 주억거리며 그래,

스스로 선택한 시련은 시련이 아니야, 맞장구쳤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블랙홀을 헤쳐 나가고 있는 그녀는

두 눈에 핏발, 진한 다크서클을 달고

작은 몸에 납덩이같은 배낭을 맨 채

새벽 내내 남대문 시장에서 옷과 액세서리를 고른다.

안전은 결국 환상일 뿐이야,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절벽, 나뭇가지에 매달려

하냥 떨어지는 꿀을 핥고 있을 순 없어

우리는 자유를 향한 그녀의 도전에

신나게 뿌뿌, 뿔나팔을 불어 주었다


고되어도, 홀로여도, 노동 없는 보상이란 한 톨 없어도,

그녀는 구속의 나날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녀의 작은 가게를 생기 있는 북적거림으로 꾸며줄 보물을 찾으며

보따리장수, 자유의 여신 그녀,

밤새도록 고난의 횃불을 훤히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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