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직장으로 이직한지 일년 쯤 되었을 때다. 당시 기관 운영비가 부족해 적자로 허덕일 때였다. 곧 조직이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던 나는 한 명리학자에게 찾아갔다. 평소 인생은 저마다 시기가 다른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던 그분은 이제 입동과 함께 내 인생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앞으로 십여년 넘게 인생의 시린 겨울과 춘궁기의 봄을 겪을 것이라고 그분은 내게 경고했다. 그 말들이 언령의 힘으로 자기실현적 미래를 불러올까 겁이 났다.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과 우울함에 빠질 때는 나를 얽어맬 수도 있는 말들을 전해준 그 분과, 돈까지 내고 굳이 그 말을 들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 분이 굳이 인생의 겨울이 다가 온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사십 대 중반부터 육십 대 초반까지 중년의 시기는 쇠락과 하강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시련을 예고하는 말에 매여 힘겹고 우울한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시련 속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아내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갖출 것인가? 이 두 가지의 선택지 앞에,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택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인생의 겨울을 예고한 그 분은 자신이 풀이한 인생의 사계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고도 했다. 당시 독일의 총리이던 메르켈이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분명 겨울의 시기에 접어든 사람인데 겉으로 쇠락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나 같은 기질의 사람은 인생의 겨울이 닥칠 때 자신 속의 사막으로 들어가 조앤 롤링처럼 판타지를 써보는 것이 좋다고도 했다.
노후의 불안과 육체의 쇠락을 견디어내기 위해서는 저마다 방안에서 보일러를 틀고 사막 같은 열기를 피워 판타지를 쓰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막에서는 누구나 시를 쓴다'는 말을 두바이의 의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판타지와 시를 쓰며 보내는 중년과 노년은 한 겨울 속에 피어나는 동백꽃처럼 아름다우리라.
지난 십여 년의 시간은 주박처럼 나를 휘감으려 하는 겨울에 저항하는 시간이었다. 시린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겁난다는 내 말에 누군가는 말했다. 현대인에게 있어 겨울은 방 안에서 보일러를 틀고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보낼 수도 있는 시간이라고. 그렇게 그 시간 동안 '따스한 겨울맞이 중년의 시간'이란 제목을 붙이고 간간이 글을 썼다. 그 시간들의 기록이 지금 쓰는 이 글들 곳곳에 심겨져 있다.
십여 년 전의 나는 이렇게 적었다.
뿌리 뽑지 마세요
자신의 존재를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때는 언제인까요?
따뜻한 밥을 지어 사랑하는 이들을 배불리 먹일 때인가요?
늘어나는 통장의 숫자와 넘치는 풍요함을 누릴 때인가요?
삶의 여정에서 인연 닿은 이들과 마음 섞는 그 자리도 좋지요
가만히 앉아 스스로의 속 우물 들여다보는 순간도 필요하지요
내 존재가 가장 만족스러운 때는
언어를 길어 올려 순간의 흔적을 남기는 지금 창조의 이 순간이네요.
스스로 애써 심은 것을 뿌리 뽑지 마세요
그렇다. 스스로 애써 심은 것을 뿌리 뽑으면 안 된다. 인생의 겨울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 십여 년 전의 내가 여기 저기 글의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심은 것이라면, 십여 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지향하는 존재가 되어 지금의 나를 힘껏 격려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창조의 시간들을 이어 연결시키면 자신의 별자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꿈
꿈이 제 먼저 가다
길을 잃고 내게 돌아와
섧게 울고 있네
눈물은 나뭇가지에 걸려
빗방울처럼 햇살 아래
으스스 떨다
몇 번 물기를 털면
살 속으로 스미는
일월 한기 같은 그리움
먼 눈길 좇으며
또다시 꿈은
동구 밖을 먼저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