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막막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다가올 시간의 무게가 거대한 파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충사(蟲師)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시리즈물이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에 있는 벌레들이 일으키는 신비하고 기괴한 사건들과 이 사건들을 해결하는 충사(蟲師)라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벌레의 시간'이라는 에피소드에는 사람의 콧속에 기생하며 나팔꽃과 같은 하루 주기의 삶을 사는 벌레가 나온다. 이 벌레의 숙주가 되는 인간을 생신이라 부르는데, 저녁이 되면 급속하게 쇠약해지고 늙어 죽는 것처럼 잠들었다가 아침이면 생기를 되찾아 멀쩡하게 일어나곤 한다. 이 벌레에 감염되었던 소녀를 충사가 치료해준다. 다음날 저녁, 바다를 바라보던 소녀가 말한다.
"왠지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생신이었을 땐 해가 저물고 쇠약해져서 잠이 들 때면 늘 매우 충만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었는데 지금은 두려워요. 눈을 떠도 단지 어제와 같은 현실이 기다리고 있을 뿐, 눈앞에 펼쳐진 끝도 없는 방대한 시간 앞에 발이 얼어붙어요."
<충사, 벌레의 시간>
벌레의 시간을 살 때 소녀는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숨을 쉴 때마다 새로웠고, 무언가 생각하려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항상 마음속이 충만함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했다. 생각이 아닌 순간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의 삶을 사는 벌레의 시간에 동조되어 순간을 살던 인간이 문득 자신이 가진 시간의 흐름을 되돌려 받았을 때 느낀 그 두려움과 불안, 눈앞에 펼쳐진 끝도 없는 시간 앞에 발이 얼어붙는 그 막막한 기분을 나도 알 것 같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펼쳐질 막막한 시간이 자신 앞에 있다는 사실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지 않은가? 매일 매일 다가오는 시간이 생생하고 생기롭고, 내일에 대한 기대로 가슴 설레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는 그랬음이 분명하다.
벌레의 시간에서 깨어나 인간의 시간을 살았던 소녀는 결국 다시 자발적으로 벌레의 시간을 선택한다. 생각할 겨를이 없는, 순간순간의 충만함을 선택한 것이다. 소녀가 선택한 벌레의 시간은 마치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다. 순간의 충만감은 있을지언정 인간을 자신에게서 영원히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내면의 기쁨에서 분리된 인간은 홀로 밤길을 걷는 듯 자신이 걸어가는 시간이 막막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으로 살고 싶은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생신이 될 때는 자신 앞에 주어진 시간으로 살고 싶은 모습, 이루고자 하는 꿈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어제와 같은 현실, 그 방대한 시간 앞에 발이 얼어붙는 건 그 시간으로 무얼 해야 하는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인간인 나는 여전히 매일 내 앞에 펼쳐지는 불안 앞에서 물어 본다. 네 꿈이 뭐야? 미미한 너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꿈이 있어? 너는 미약하지만 꿈은 위대해도 되잖아? 왜 너는 너를 믿지 않니? 네가 되고자 하는 모습을 왜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지?
생신이 되어 느끼는 충만함이 아닌 인간이기에 느끼는 불안, 두려움을 수반한 그 인간의 위대한 불안감은 위대한 꿈으로 나를 이끌어 주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내면의 기쁨을 다시 찾아가는 시간, 매일 매일 아침이면 항아리 속에 던져진 속으로 불타는 태양, 그 빛을 사랑하는 기쁨의 시간을 다시 꿈꿔본다.
갈증
꿈의 크기가
이 목마름의 크기와 같은 거라면
진작에 땅을 파고 들었어야 옳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
물을 얻을 자리였다.
할퀴어도 빗금하나 새겨지지 않는
허공을 오르는 줄 진작 알았더라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래
애시당초 사다리를
그리지 않았을 것.
이 목마른 헐떡거림이
여전히 정체가 없는 거라면
허공의 사다리를 쓱쓱 지우고
이제는 땅을 파며 한 방울 땀
쓰윽쓱~ 훔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