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세상 만사 중 가장 중요한 일
직장인들의 세상 만사 중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아마도 점심 메뉴 선택일 것이다.
누가 나에게 '뭐 드시고 싶으세요?'라고 하면,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순대국이요!'라고 대답한다.
순대국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 가장 좋은 것은 가격이 저렴하면서 양이 푸짐하고, 김치를 무한정 먹을 수 있고, 피를 맑게 해준다는 정구지도 한 움큼은 족히 먹을 수 있으며 고소한 들깨가루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다른 모두가 약속을 떠나고 남겨진 우리 팀 세 명은 사무실이 있는 1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올때까지 뭐먹지?를 반복하다가 구 쏘련의 시베리아같은 바깥 공기를 접하고서야 이런 날씨에는 고민하는 것도 사치라는 것을 깨닫고서 황급히 점심 장소를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정해진 곳이 바로 순댓국집이었다.
아마 아무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 날, 순댓국집을 가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조금 더 눈치가 빠르거나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에 조금 더 민감한 사람이었더라면 순댓국집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순댓국집 가는 길에 지금 가려는 순댓국집이 얼마나 인기있는 곳이며 점심시간에는 얼마나 아저씨들이 바글바글한지, 또 가격은 얼마나 저렴한지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댔고 시베리아의 칼바람을 뚫고 마침내 도착한 우리는 잠깐의 웨이팅 끝에 어두침침하고 누린내가 진득한 순댓국집 테이블 한 켠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단촐한 메뉴판을 수 초 만에 빠르게 스캔한 후, A님과 나는 사골순댓국을 시켰고 B님은 순두부를 시켰다.
순댓국집에서 순두부? 순간 두 가지 생각이 들었는데, 하나는 왜 순댓국집에 순두부를 팔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었고 다른 하나는 B님은 순두부를 좋아하나보다, 하는 것이었다.
시덥잖은 대화가 몇 마디 오가기도 전에 두 그릇의 순댓국과 한 그릇의 순두부가 나왔다. 뽀얀 국물에 다대기를 풀어 분홍빛 도는 그 국물이 얼마나 맛있던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비웠고, 치아 사이에 잔뜩 끼었을 것이 분명한 들깨가루를 제거하기 위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그제서야, 맞은편 B님의 그릇이 보이기 시작했다.
뚝배기에는 정말이지 방금 서빙된 것 같은 순두부에서 아직 미열이 남았는지 초봄의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고 스댕 재질의 공기에는 귀퉁이만 약간 허물어진 공기밥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아뿔싸,
B님은 원래 순댓국을 못 먹는 것이 분명하고, 어쩔 수 없이 시킨 순두부마저 가게 전체에서 진동하는 순댓국 냄새 때문에 잘 먹지 못한 것일 것이다.
B님은 원래 그런 분이었다. 다른 사람 의견에 토 달지 않고, 트러블 일으키지 않아도 일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믿는.
그런 B님이었기에 아마도 회사라는 단체생활에서 굳이 다른 동료가 먹자는 메뉴에 반하는 의사 표시를 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았다.
뒤늦게 뭔가가 이상한 것을 깨달은 A님도 왜 잘 안 드세요?라고 물어봤지만 B님은 여느 때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냥 배가 별로 안 고파서요! 라고 했고 우리는 여느 때처럼 각자의 카드로 각자 먹은 것을 계산한 후, 돼지 냄새가 진동하는 소굴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