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생 엄마의 소신껏 육아
세 아이의 육아를 하면서 나름 지키는 소신은 ‘무엇을 더 해 줄까?’보다 ‘무엇을 하지 않을까?’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MZ세대인 나는 자라면서 나의 부모 세대에 비하면 많은 것을 부족함 없이 받아왔다. 따라서 내가 못 했으니 내 자식은 나보다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고, 잘난 직업(?) 구해 잘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다. 지금도 이미 그렇지만, 앞으로의 세상은 더욱이 대학 잘 나온다고 취업이 보장되지도, 직업이 한 개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입시라는 목표 하나만을 두고 열심히 달려 결승선에 도착한 뒤, 뒤늦게 대학에서 내가 진정으로 뭘 하고 싶나 고민하는 방황 기를 겪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에게 ‘결핍’을 주고 싶다. 소중한 내 아이에게 부족함 없이 모든 걸 줘도 모자랄 판에 결핍이라니 싶을 수도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루소의 <에밀>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손에 다 넣어주는 일이다.’ 언제나 무엇이든지 다 떠먹여 주면 자식이 커서 나중에 부모에게 고마워할까? 아니다. 오히려 부모 탓을 할 확률이 높다. 왜 그렇게 나를 키웠냐고.
덧붙여, 아이를 위해 내가 하는 선택이 무조건 옳다고 자부할 수 없다. 나 때(라떼)랑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를 겪으며 가속화된 변화와 생존의 위기를 마주해 보니, 아이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세상의 변화에 비하면 내가 겪어온 세상의 범위는 편협하고 작아 보인다. 그래서 더 잘 모르겠다. 어릴 때 한 살이라도 빨리 한글을 깨쳤으면 하는 마음에 내 기준으로 글자를 알려주는데 급급하다 보면 아이의 다른 창의력을 발달시키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글자를 아는 순간 길거리 간판의 텍스트 자체가 눈에 먼저 들어올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저긴 뭘 하는 곳일까 상상하는 재미를 잃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미술도 수상경력을 만들어준다는 학원을 다니면 학원 선생님의 기준이나 대회 입상 기준에 맞춰 아이의 상상력이 제한될 수도 있지 않을까.(모든 미술학원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 선택을 더하기 전에 빼고 아이에게 기회를 주면, 나도 아이도 서로 부담이 없다. 엄마인 내가 고민하고 선택하여 전집을 들이지 않는다. 대신 서점에 놀러 가 아이가 끌리는 책을 선택하여 단행본 위주로 산다. 도서관에서 내가 선정한 책을 일괄로 빌려오지 않는다. 대신 아이가 직접 도서관의 서가를 탐험하며 끌리는 책을 발견하고 보고싶은 만큼 빌려 온다. 내가 일방적으로 아이의 옷을 사지 않는다. 아이가 직접 옷가게에서 원하는 취향의 옷을 고른다. 아이가 주는 대로 먹고, 읽고, 입는 삶이 아닌 아이가 자율성, 즉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풍부하게 가지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교육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같은 원칙으로 적용된다. 내가 아닌 아이의 의견을 묻고 아이의 선택을 존중한다. 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 주변에서 몇 살부터 영어유치원을 보낼 것이냐 말 것인가를 고민할 때, 또는 매일 하는 영어수업을 60분을 시킬 것이냐, 90분을 시킬 것인가를 고민할 때, 나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엄마들은 어찌하는지 묻기 전에 내가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할 사람은 나의 아이 아닌가. 다니는 주체는 내 아이니까 말이다. 주변 엄마들의 동향보다 아이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나의 기준이다. 아이는 원어민 선생님과 유치원 교실에서 파닉스와 영어동요를 배우는 시간보다는,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노는 시간을 선택하였다. 나중에 아이가 스무 살이 되어, 굳이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선택을 할지라도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하고 싶다. 대학을 가겠다면 그 선택도 존중하지만, 굳이 가지 않겠다면 다른 선택지를 향한 결정도 존중한다.
초등학생인 지금까지 그렇게 아이는 그 흔한 학습지나 방문 수업, 학원 수업을 받지 않고도 잘 크고 있다. 학교에 다니고, 학교에서 하는 방과 후 수업을 스스로 배우고 싶은 것 위주로 선택해 듣는다. 사교육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다니고 싶다고 먼저 이야기 꺼내는 시점에 언제든지 함께 알아보고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중요한 건 아이가 하고 싶은 그 마음이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여 운동장에서, 놀이터에서 두세 시간씩 뛰어 논다. 매일 놀아도 지겹지도 않은지 혼자서 놀고, 엄마랑 둘이 놀고, 친구들과 뛰어 논다. 운동장에서 아이는 반짝반짝 빛이 난다. 아이의 자율성을 가장 활발히 키울 수 있는 장소로 운동장 만한 곳이 없다. 같은 장소에서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열심히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장 귀하고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느낀다. 이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정답 찾기 대신 아이의 반짝이는 호기심에서 비롯한 자발적 동기가 바탕이 되어 좋은 질문을 하고 자신만의 답을 만들어 가기 위한 토대, 커다란 자양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어린 자식이 있다면 최선의 능력을 다해 돕고 지도하고 보호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일이다. 존재할 공간을, 아이는 당신을 통해 이 세상에 왔지만 ‘당신의 것’이 아니다.
-에크하르트 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