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손가락 끝을 타고 내려오는 물방울을 보며 나는 지난달에 했던 체육대회 날을 떠올렸다.
그날만큼 행복한 날은 없었는데...
그날 축구 결승에 나가는 민혁이 재킷을 벗어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내 무릎 위에 던졌다. 말로는 잘 보관하라고 했지만 남자애들은 얼~이라는 야유를 보냈고, 여자애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왜 맨날 나한테 가지고 있으래.”
말과 다르게 나는 그 애의 옷을 한껏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내가 그냥 벤치에만 앉아서 옷만 지키고 있었다면 그렇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받진 못했을 것이다.
남자 축구에서 우승을 한 우리 반은 기세를 몰아붙여 여자 풋살에도 기대를 걸었다. 여자애들은 대부분 억지로 풋살 경기에 나왔기 때문에 대충 하거나 기권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예선전부터 결승까지 진행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줄다리기를 하기로 되어있기 때문에 벤치에서 우리 반 여자친구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반전이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5:0으로 지고 있었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답답해 미치겠는지 머리통을 양손으로 감싸며 소리를 질러댔다.
“야 황진아 더 앞으로 나가라고.”
“임주연 걷지 말고 좀 뛰어.”
그때 내 안에서 이상한 자신감과 사명감이 생겼다.
나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무릎에 덮고 있던 재킷을 민혁이에게 건넸다. 그때 그 애의 눈이 튀어나올 같았던 걸 윤서도 봤어야 했는데. 나는 운동장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황진아에게 다가갔다.
“유니폼 벗어. 내가 후반 뛸 테니까.”
황진아는 잘됐다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빨간색 조끼를 벗어줬다. 그리고 10분 뒤 나는 우리 반의 영웅이 됐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6골을 연속으로 넣어 결국 우리 반에게 여자 풋살의 우승컵을 들려줬기에. 민혁은 친구들에게 둘러 쌓인 나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 행복한 날의 정점은 운동장 뒤편에 있는 수돗가에서였다. 운동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느라 온통 뒤집어쓴 흙먼지를 닦아야 했다. 수도꼭지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시원한 물이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손과 목덜미를 비누로 닦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차가운 물방울이 팔꿈치로 날아왔다.
민혁이 수도꼭지에 손바닥을 납작 붙여 포물선을 그린 물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 애는 양손에 물을 받아 도망가는 나를 따라왔고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그 애를 쫓았다.
우린 그렇게 서로의 뜨거운 심장을 들키지 않으려 찬물로 온도를 맞추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민혁은 더 이상 나에게 물장난을 치지 않는다.
아마도 그 아이의 심장은 이미 다 식었기에 찬물을 뿌리면 추워서일 것이다.
그런 내게 정훈이 대신 물장난을 걸어온다.
민혁이 아닌 것은 아쉽지만 정훈의 관심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서로에게 또롱또롱 맑은 설렘을 주고받는데 민혁이 춥다 못해 꽝꽝 얼은 한마디를 내뱉는다.
“뭐 하냐. 유치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얼굴이 타들어갈 듯 붉어졌다.
정훈은 애써 민혁의 말을 무시하며 나에게 몇 방울의 투명함을 던져 차갑게 굳은 내 얼굴과 마음을 녹이려 애쓴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음은 물 몇 방울의 쉬이 녹지 않는다.
“그만해. 유치하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