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책 반납일이라 도서관에 갔다가 빌리려던 책 외에 눈에 들어온 책이 있어서 펼쳐보지도 않고 제목만 보고 빌려온 책에 '주변에서 흔히 만나지는 민들레는 민들레, 서양민들레, 흰민들레가 있습니다.' 이런 문장이 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머릿속에서 '삑!'하고 경고음이 울렸다. 국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출판사 편집자라든가 관련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몸이 반응해 버린다. 집중을 할 수가 없어서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났다.
잠이 안 와서 붙잡고 있다가 저 문장에서 아예 잠이 확 달아났지만, 저건 옥의 티일 뿐 책은 훌륭하다. 그래도 제목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민들레는 민들레, 서양민들레, 흰민들레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는 민들레, 서양민들레, 흰민들레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흔히 눈에 뜨이는 민들레는 민들레, 서양민들레, 흰민들레가 있습니다.'
이렇게 바꿔서 읽어봤다. 난 아무리 읽어봐도 '만나지는'이라는 표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나는 가만히 있는데 민들레가 억지로 끌어당기기라도 한다는 말일까?
한국말은 '보다'라는 말의 피동형도 '보여지다'라고 하지 않고 '보이다'로 표현할 만큼 굉장히 주체적인 언어인데, 10명이면 9명? 아니 10명 다라고 해야 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여진다'라고 한다. 심지어 TV 자막, 인터넷 기사에서도 보이길래 학교 졸업한 지가 오래돼서 내가 바뀐 문법을 모르고 살았나 반성하면서 사전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 '보이다'는 나오는데 '보여지다'는 검색에 뜨지 않았다. 사전의 특징이 대중화 된 말은 맞냐 틀리냐를 떠나서 일반화, 보편화 되어 있다는 이유로 익숙함의 차원에서 둘 다 인정해 복수표준어로 사전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먹거리'다. 원래 '먹을거리'가 맞는데 사람들이 하도 '먹거리'라고 쓰니까 사전에 올라가게 되었다. 허용의 기준으로는 뜻의 차이를 들었는데 문제는 '먹거리'는 2011년부터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는 '먹거리'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사전부터 찾아보자.
먹을거리
-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나 식품[다음]
- 먹을 수 있거나 먹을 만한 음식 또는 식품[네이버]
먹거리
- 사람이 먹는 온갖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다음]
- 사람이 살아가기 위하여 먹는 온갖 것[네이버]
사전에 실린 예문들을 보자.
추석은 먹을거리가 풍성한 명절이다.
저 골목에 가면 먹을거리가 많을 거야.
우리 아이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먹거리를 소개합니다.
환경 오염으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람들이 이런 거 구분해서 쓸까? 먹을거리는 먹을 수 있냐 없냐에 의미를 두고 있고, 먹거리는 전부냐 일부냐에 의미를 두고 있다. 보통은 단어를 찾으면 사전의 뜻풀이에서 이해 안 되던 게 예문을 보면 이해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단어들은 단어의 정의는 이해가 되는데 예문에서 헷갈린다.
'거리'라는 말은 '관형사형 어미'에 붙거나 '체언에 붙거나'다. 그런데, 먹거리는 체언에 이어진 것도 아니고 관형사형 어미도 없는 정체불명 형태다.
'보여지다'라는 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쓰고 있으니까 맞는 표현으로 인정하겠다고 사전에 올라가는 날이 올 지도 모르겠다. '보여지다'라는 말은 '보이다'라는 피동사에 '어지다'라는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 한 번 더 붙은 말이다. 굳이 '보이어지다'라고 이중 피동을 만든 다음 그걸 줄여서 '보여지다'라고 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런 심오한(?) 실수일까? 아니면 영어 수동태의 영향일까? 한국어에 '보여주다'라는 말은 있어도 '보여지다'라는 말은 없다.
아래의 문장들은 수동태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It can be seen by anyone.
No one was to be seen in the park.
HUMAN ACTS was written by Han Kang
이 문장들을 '누군가에 의해 보여질 수 있다.', '공원에는 아무도 보여지지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에 의해 쓰여졌다.' 이렇게 번역하면 망작이다. 정말 맥빠지는 번역이다. '누구나 볼 수 있다.', '공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한강이 썼다.' 이렇게 번역하는 게 자연스럽다. 영어의 수동태 문장을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한국말도 이렇게 써먹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생각하다'를 '생각되다'로 쓰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전에도 올라가 버렸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의 종이사전에는 '생각나다'라는 말은 올라가 있어도 '생각되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사전에 올라가 있는 뜻을 살펴보자.
생각되다
- 화자에게 여겨지거나 헤아려지다[다음]
- 어떤 일에 대한 의견이나 느낌을 갖게 되다.[네이버]
사전 예문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다음]
옳다고 생각되면 끝까지 밀고 나가라.[네이버]
생각하다
- 사전에 뜻이 번호를 매겨 설명해 놓았을 정도로 뜻이 여러가지라 옮기기엔 무리다.
그래서, 영어 사전에서는 '생각하다'와 '생각되다'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찾아보려고 '생각되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단어를 한영사전에서 찾아봤더니 똑같이 'think'라고 쓰기도 하고, believe, consider, feel, seem, look, appear이런 단어를 쓰기도 했다. 딱 떨어지는 단어가 없다. 이걸 두고 영어에는 없고 한국어에만 있는 표현이라고 우기려나?
국어사전에 실린 예문들을 바꿔봤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라.
'생각하다'로 바꿔서 말이 되는데 굳이 맞지도 않는 '생각되다'로 써야 되는 이유는 뭘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한국말은 주체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굳이 '생각되다'로 쓸 필요가 없다. '화자에게 여겨지거나 헤아려지다'라는 다음 사전 뜻풀이 자체가 적극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역동성이 떨어진다. '화자에게 여겨지거나 헤아려지다'는 또 무슨 말인가. '-어지다'는 행위를 '받는/당하는' 일이다.
사전에 '생각되다'가 올라가 있다보니 인터넷에 '생각되어지는'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생각되는'도 아니고 '생각되어지는'이란다. 생각되는이든 생각되어지는이든 나는 생각하기 싫은데 내 의지랑 상관없이 생각을 당한다는 뜻으로 쓰는 걸까? 생각되다 = 누군가 내 머리에 생각을 집어넣어 준다?
진짜 절망스런 표현은 따로 있다.
TV 인터뷰를 보다 보면 '그래서 좋은 거 같아요.', '기분이 좋은 거 같아요.', '맘에 드는 거 같아요.'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좋고 나쁘고는 내 기분이고 내 느낌이고 내가 알 수 있는 건데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거지 이게 좋다는 건지 안 좋다는 건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내 기분을 나도 모르겠다로 들린다. 세상은 이렇게 말하는 걸 예의라고 한다.
1. 내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면 건방지다는 딱지를 붙이는 분위기
2. 책임소재를 피해가려는 음흉함
3. 내 느낌, 내 기분, 내 생각에 확신 없음
이 언젠가부터 예의, 겸손으로 둔갑해 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말은 원래 주어가 생략되는 언어인데,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는지 이런 식으로 모호하게 흐려놓고 책임을 피해가려고 한다. 문장의 주체가 '나'일 때는 '그래서 좋아요.', '기분이 좋아요.', '맘에 들어요.'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도 언제부턴가 이렇게 확신을 담아서 자기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어차피 시작한 거 하나만 더 언급하자. 나는 식당에서 밥 먹고 계산하러 갔을 때, 물건 사고 계산할 때 "계산 도와드릴게요." 이러면 참 황당하다. 아니, 내 지갑에서 카드 꺼내는 걸 도와준다는 건가? 뭘 도와주겠다는 거지? 난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이 말이 왜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로 둔갑했는지 정말 신기하다.
나는 인터넷 기사나 공식적인 글에서 '생각한다'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 글을 누가 썼는지 글 읽다말고 이름부터 찾아볼 때도 있다. 온통 '생각된다', '생각되어집니다'로 쓰는 글 투성이라 가뭄에 콩나듯 보이는 글이 반갑기 때문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나 누구 영어 가르쳐줄 일이 있으면 수동태는 영어 문장으로 말할 때 수동태이지 한국말로 번역할 때는 굳이 수동태로 바꿔서 말할 필요가 없다고 꼭 얘기해 준다. 어떨 때 수동태를 살려서 해석을 하는지와 함께 '보여진다', '생각된다' 이런 실수들을 하지 말라고 같이 알려 준다.
블로그에 수동태 설명하는 글을 보면 'is thought'를 '생각된다'로 해석해 놓은 블로거들이 많다. 수동태 문장에서도 '생각된다'로 사용하고, 일상에서 내 생각을 말할 때도 '생각된다' 이대로 사용한다. 영어에서 is thought를 쓸 때는 주어가 일반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사실을 전달할 때 사용한다. 그래서, is thought면 그냥 '생각된다', 'thought'면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is thought냐 그냥 thought냐 동사의 형태를 보고 판단할 게 아니라 문장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봐야한다. 생각의 주체가 '나'이면 수동태이든 능동태이든 한국말로는 '생각한다'인 거고, 생각의 주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사물이면 '여겨진다'의 뜻이다.
생각은 내가 내 머리로 하는 거지 남이 내 머리에 넣어주는 게 아니다. 고로, 생각은 '(내가) 하는' 거지 '(내가) 되는' 게 아니다. 생각이라는 행위는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므로 나의 주체성을 담보하지 타인이 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생각되다'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나 아닌 다른 누군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얘기다. 같은 책('주변에서 흔히 만나지는 민들레는 민들레, 서양민들레, 흰민들레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등장한 책)에 '일본 규슈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은 저자 자신이 추측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한다는 얘기다. 만약 저자가 추측했다는 얘기라면 '(저는) 일본 규슈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추측합니다.' 이렇게 써야 한다. '추측하다'와 '추측되다'는 이렇게 어머어마한 차이가 있다. '생각한다'와 '생각되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설사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추측을 하든 생각을 하든 생각의 주체를 밝혀주고 '추측하다', '생각하다'로 쓰는 게 훨씬 살아있는 문장으로 다가온다. 누구에게든 생각이나 추측은 자기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인데 마치 당하는 것처럼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의 주체(그러니까 문장의 주어)를 밝히지 않고 쓰는 '생각되다'는 다 엉터리다.
올해 들어 읽었던 어떤 책에 하도 황당한 문장이 연달아 나오길래 맘 먹고 눈에 뜨이는 대로 적어봤다.
"나 이외 두 사람의 문학적 재능은 우리 문학사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78)
"나의 몸에는 분명히 경석 오빠의 영향이 스며 있다고 생각됩니다."(91)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죄 값으로 하나님의 분풀이는 너무 참혹한 저주라고 믿어집니다."(107)
"하기야 처음 보는 유화 개인전이니 신기함 때문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믿어집니다."(117)
"지금은 새 길을 찾기 위한 고뇌의 기간이라고 보아집니다.(179)
"평생을 선방에 앉아 지내는 것도 보람찬 일생이라 믿어집니다."( 228)
"화려함에의 환원, 이것이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고 정상적인 생활이라 한다면, 나는 분명히 세속적으로 비참한 생을 영위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256)
"거리낌 없는 세월, 내 인생의 후반부는 바로 이런 세계를 지향했다고 보아집니다."(269)
이 문장들은 모두 비문이다.
"나 이외 두 사람의 문학적 재능은 우리 문학사에서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고 봅니다."
"나의 몸에는 분명히 경석 오빠의 영향이 스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죄 값으로 하나님의 분풀이는 너무 참혹한 저주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처음 보는 유화 개인전이니 신기함 때문에 후한 점수를 주었다고 믿습니다."
"지금은 새 길을 찾기 위한 고뇌의 기간이라고 봅니다.
"평생을 선방에 앉아 지내는 것도 보람찬 일생이라 믿습니다."
"화려함에의 환원, 이것이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고 정상적인 생활이라 한다면, 나는 분명히 세속적으로 비참한 생을 영위하고 있다고 봅니다."
"거리낌 없는 세월, 내 인생의 후반부는 바로 이런 세계를 지향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바꿔야 의미가 제대로 전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