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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친구

사소한 관계

by 햇살나무 여운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갈 무렵 늘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아이들을 막 어린이집 차에 실어 보내고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들의 모습이다. 그 풍경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또 다른 풍경이 하나 있다. 어릴 적 매일 아침 해 뜰 무렵과 저녁 해 질 무렵이면 우리 동네 참새떼가 어김없이 집 근처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모여 재잘재잘 짹짹거리며 회의를 했다. 처음엔 한두 번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일정하게 계속 목격되면서 그들만의 일정한 규칙과 질서가 있음을 짐작하게 되었다. 엄마들의 모임이든, 참새들의 모임이든 한 동네에 모이고 어울리는 그 무리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몹시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거기에 끼고 싶었다.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회에서 맺은 관계들도 정리되었고, 10년 가까이 저녁 시간이라고는 가져본 적 없이 온 힘을 다해 남편과 함께 맡아왔던 명상센터도 코로나를 거치면서 사정이 생겨 정리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탓도 있었지만, 거기서 맺었던 인연 대부분이 나보다 한참 연장자들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 후로는 만날 일이 거의 없기도 했다. 아이가 없이 오래도록 그렇게 일만 해오다가 덜렁 떨어져 나오고 보니 나는 어쩌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정서와 일상을 공유하며 가깝게 지내는 또래 친구가 없었다. 한 지역에 산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언니 동생 친구 삼아서 서로 시시콜콜 일상도 나누고 먹거리도 나누고 이런저런 정보도 공유하면서 너무 멀지도 너무 깊지도 않게, 언제라도 집 앞에서 편안한 옷차림에 슬리퍼 끌고서 커피 한 잔 나누며 어울릴 수 있는, 마음 잘 맞는 그런 동네 친구 한 명쯤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침마다 바라봤던 그 엄마들처럼.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지만, 나는 때때로 외로웠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해야 할까? 거의 휴일도 없이 활발하게 활동해 오다가 갑작스레 경제적으로도 관계적으로도 고립과 단절을 동시에 겪으니 나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났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아온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최근까지 엄습했던 불안과 우울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평생을 함께 갈 오랜 친구들도 있고, 남편과도 많은 걸 공유하며 부족함 없이 친밀하게 잘 지낸다. 그리고 그동안에 사회생활과 인간관계에서 너무 지쳐서 쉬고 싶은 마음도 컸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뭐랄까 당장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의 입지가 너무 좁고 납작한 것에 대한 스스로 만드는 걱정과 소외감이랄까?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노력 속에서도 이미 형성된 그들만의 리그에 끼어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시간을 내고 마음과 정성을 쏟아도 내 맘과는 다르게 그 선을 넘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고, 필요로 맺어진 관계는 어떤 목적이나 목표가 달성되면 그 유효기간도 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다. 알면서도 때로는 그것이 못내 서운할 때도 많았다. 그리고 아무리 좋아 보이는 관계도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갈등도 많고 상처도 많다는 걸 물론 알고 있다. 또한 내가 그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듯이 오히려 거꾸로 내 모습 중에 어떤 부분을 부러워하고 있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서로 그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관계를 부러워하는 건 그들이 손에 잡히는 물리적인 관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카톡이나 SNS에서 보이는 그런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니라, 꼭 무슨 일이나 목적이 없이도 만나고 만져지는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관계 말이다. 오고 가며 마주치면 반갑고 잠깐의 안부와 대화만으로도 좋은 그런 관계 말이다. 어딘가에 의지할 수 있는 연고가 있다는 말은 꼭 혈연이 아니어도 같은 땅을 밟고 서서 비슷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내가 지금 여기에 뿌리내리고 남들처럼 일상을 ‘살고 있다’라는 현실적인 안정감을 주는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서 가끔 그런 장면이 나온다. 워킹맘이 다급한 일이 생겨 아이를 부탁해야 하는데 그 수많은 전화번호 중에서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을 해야 하나 망설이는 장면 말이다. 나 역시 한 번쯤 상상해 본다. 지금 당장 나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그 갑작스러운 연락에 걱정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선뜻 한 걸음에 달려와 주거나 손길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남편과 나는 당장에 의지하고 도움을 청할 만한 형제나 친인척이 없어서 그런 걱정이 더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트라우마에서 온 불필요하게 과한 걱정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이 있다. 그건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관계는 바라는 기대가 높은 만큼 의무감이 때로는 실망과 서운함이 되기도 하고 서로에게 부채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 관계가 무너지면 삶도 무너지기 십상이다. 인생에서 아름드리 느티나무 같은 크고 깊은 한 사람의 우직한 인연도 더없이 감사하고 소중하지만, 별것 없어 보이는 잔뿌리들일지라도 서로 얽히고설켜 쉬이 휩쓸려가지 않게 붙잡아주기도 하는, 그런 푹신한 잔디밭 같은 사소하고 잔잔한 인연들도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데에 큰 힘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고 이제는 한 곳에 일정하게 뿌리내리고 터를 잡고 산다는 건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나도 이제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그런 잔뿌리들을 다시 넓혀 가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을 이제는 '우리 동네'라고 부르며, 바로 그 우리 동네에 나만의 참새 방앗간도 만들고, 거기서 어울리는 동네 친구들 무리도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모이는 그 참새떼처럼 나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보란 듯이 ‘끼여서’ 옹기종기 짹짹짹 재잘재잘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소중하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이 즐겁고, 당신과 밥 먹고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그 시간이 내게는 참 중요하다. 그 사소한 시간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그 사소함이 나를 살게 한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저 이파리들만큼이나 사소하지만 가을의 숲을 완성하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이다. 사람은 참 관계지향적인 존재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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