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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증명서

경단녀 vs 취준생

by 햇살나무 여운

나는 취준생이다. 나도 취준생이라면 취준생이다. 재취준생! 굳이 아직까지는 경단녀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경력 단절이라고 말할 때 정확히 어느 시점, 어느 기준에서부터 ‘단절’이라고 하는 것일까 문득 의문이 든다. - 그런데 '경단녀'라는 단어는 있고 '경단남'이라는 단어는 없다. 이 또한 하나의 현실을 말해주는 듯 하다. -


뒤늦게 일을 시작해 요즘 한창 일 재미에 빠진 친구가 바쁘고 힘들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뒷면에서 친구의 즐거움과 활력도 읽힌다. 예전엔 친구가 나를 보며 ‘왜 그렇게 일을 못 해서 안달일까?’ 여겼었단다. 그런데 이제는 이게 사는 것이구나 싶어서 그랬던 나를 너무나 이해한다고 그래서 대단하다고 말한다. 그 이해가 고맙고, 우리의 바쁨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며칠 전 만났던 70대 초반의 한 아주머니는 그 나이가 무색할 만큼 밝고 활력이 넘쳐 보이셨다. 눈빛이 반짝거리며 얼굴에서 빛이 나신다. 컴퓨터 자격증을 따서 봉사활동도 하시고, 바리스타 1급에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따놓으셨다고 하신다. 지금은 캘리그래피와 수영을 배우러 다닌다며 아주 바쁘다고, 목요일에만 시간이 빈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보다도 훨씬 젊게 사시는 듯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 틈에도 동네 언니분들과 즐겁게 통화를 하신다. 멋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밝고 건강하게!

재취업을 준비하며 며칠 전 한 곳에 응시원서를 내야 하는데 경력증명서가 필수라고 한다. 잠시 망설였다. 경력이 없다고 하기엔 가산점이 컸다. 먼저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를 받아서 지원하는 업무와 관련된 경력을 추려서 세어 보았다. 자잘한 곳은 제외하고 굵직한 두 곳만 넣기로 했다. 한 곳은 10년 5개월, 다른 한 곳은 4년 10개월이다. 둘을 합하면 15년이다. 버리기엔 아까웠고, 경력증명서를 보내달라고 연락하기에는 또 몹시 싫었다. 원래 퇴사를 하고 나면 그쪽으로는 정말로 오줌도 누기 싫은 법이다. 그런데 이런 날이 오기도 하는구나. 사람일은 정말 모르는 법이다. 그러니 헤어질 때 끝맺음을 잘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려받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길 잘했다.


어떤 방법으로 연락을 할까 한참 고민했다. 그런데 일한 세월을 무시는 못 하겠다. 여전히 사업자등록번호와 전화번호에 이메일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내는 성숙함을 갖추고 싶었다. 더군다나 절박함은 하기 싫은 그 마음을 거뜬히 이기고도 남는다. 나는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먼저 감정의 스위치를 OFF! 건강보험자격득실확인서를 바탕으로 철두철미하게 경력증명서 양식을 작성하고 몇 번을 더 검토한 끝에 매우 사무적인 어조로 이메일을 보냈다. 너무 오랜만이라 물론 간단한 인사는 덧붙였다. 다행히도 하루 이틀 만에 답장을 받았다. 잠시 망설이고 회피하고 싶어서 이리저리 잔머리 굴리던 내가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일이 풀렸다. (근로기준법 상에 경력증명서를 요청받고도 발급해주지 않으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게 되어있다.) 하기 싫고 못 해낼 것 같은 일도 막상 부딪혀보면 다를 때가 많다. 의외로 할 만하고 또 수월하게 풀릴 때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하기 싫은 그 일을 무릅쓰고 나아갈 때 사람은 성장한다.


나는 최종서류를 한 번 더 검토한 끝에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기다림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는 것만큼 고욕은 없다. 기다리는 만큼 시간은 더 더디게 흐른다. 제 할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내야지. 어차피 시간은 흐르고 그날은 오고야 말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좋은 소식이 오면 더없이 감사할 것이고, 떨어지면 뭐 또 찾아서 또 해보는 거다. 이제는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 될 것이고 글감 하나 버는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나는 그 정도 ‘을’은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자발적 취준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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