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생각보다 참 길다. 그리고 언제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나도 내가 이 나이에 육체노동을 하며 망치질에 묘한 희열을 느끼며 글을 쓰게 될 줄 몰랐다. 우마가 뭔지 뿌레카는 또 뭐고 노미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내 사전에 이런 어휘를 확장하게 될 줄도 미처 몰랐다.
철거작업을 하는 도중에 사수가 '빠루'로는 도저히 깨지지가 않아서 '뿌레카'를 사야겠다고 한다. 소리나는 그대로 휴대폰에서 검색해 보니 쇼핑몰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장비를 보여준다. 소리로 짐작해 보면 '프레커'쯤 되겠다 싶었는데, 'Frack'이라는 단어가 '채굴하다', '파쇄하다'라는 의미로, 즉 뿌레카(プレカ)는 파괴 햄머를 가리킨다. 그런데 아무도 "파괴 햄머"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전히 너도 나도 "뿌레카! 뿌레카!" 한다. 작업이 워낙 다급해서 새벽배송으로 받고 보니, 이번에는 사수가 "저런! 노미가 없네!" 그런다. 노미는 또 뭐야? 사실, 뿌레카만 검색해도 노미까지 자동완성으로 보여준다. '노미' (のみ, 鑿 뚫을 착)는 일본어로 정이나 끌을 의미한다. 뿌레카가 있어도 노미가 없으면, 바늘만 있고 실이 없는 것과 같다. 즉, '뿌레카와 노미'는 공사현장에서의 '바늘과 실'쯤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사수와 조수 사이를 '뿌레카와 노미'같은 사이라고 빗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마(馬, うま)'는 도배나 미장 공사에서 많이 쓰이는, 옆으로 길게 수평으로 펼칠 수 있는 네 발 달린 발판을 의미한다. '빠루(ぱる)' 역시 일본어로 괭이로 땅을 파거나 쟁긴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쉽게 쓰는 '노가다'라는 말이 거친 막노동을 의미하며 일본어에서 유래됨을 알고 있듯이, 건설업이나 공사 현장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고,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 시대에 우리가 그런 현장에 인력으로 강제 동원되기도 했거니와 그와 더불어 기술이나 도구, 장비가 그때 그곳으로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는 역사와 시대를 반영해서 새로 태어나기도 하고 활어처럼 여전히 팔딱거리며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세계에서도 이럴진데,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서는 얼마나 더 큰 지배력을 발휘할까? 그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단어 몇 개 쓰는데도 이렇게 거북스럽고 마음이 불편한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이것저것 새로운 도구와 장비들을 급하게 들여가며 기한 내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우리로서는 처음으로 맡은 턴키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수와 조수의 체급에 비해서는 너무 큰 공사였던 만큼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큰 공부가 되기도 했다. 실패나 후회는 없다. 배움만이 있을 뿐.
온갖 인테리어 장식으로 쳐발쳐발해 놓은 15평 상가 철거작업에서 시작해서 두 칸으로 나누어 원래대로 복원(원복, 원상복구)하고, 마지막으로 전등작업까지 마무리했다. 사흘 연이어 자정을 넘기며 작업을 하다 보니 때마침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이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빛을 되찾는 이 순간이 다른 해보다 유난히 더 뜻깊다.
광복절 자정을 넘기고 또 광복절 밤이 깊어가도록 남은 작업을 끝까지 꼼꼼하게 매듭짓는다. 사수는 묵직한 책임감을 낮게 깔고 앉아서 스스로 목표로 하고 약속했던 기한을 맞췄다. 이 일을 본래 좋아해서도 아니고, 잘해서도 아니다. 하다 보니 손이 되니 그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낼 뿐이다. 이왕 하는 거 그저 조금 더 즐겁게 할 뿐이다. 그 뒷모습이 성실하다 못해 성스럽기까지 하다.
새벽 두 시를 향해가는 시각, 집으로 돌아오며 웃으며 이야기한다.
"우리 10년 전에도 이렇게 새벽 별 보고 나와서 별 보고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래도 그때보다 지금이 낫다."
"아니야.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아요. 할 수 있고 물론 다 좋지만, 이제 예전처럼 무리는 하지 말아요. 2주 사이에 당신 키가 5센치는 더 줄어든 것 같애."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가 2층에서 1층 밖 주차장까지 그 무거운 폐기물들을 사수는 한없이 오르락내리락 지고 날랐다. 그렇게 또 한 번 우리는 사점(死點)을 갱신한다.
참으로 신기한 일은, 우주의 알고리즘이 작용을 하는지 새로운 장비를 들이면 그 장비를 쓸 일이 꼭 연이어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지난번 아파트에 누수 복구작업을 하며 목공에 재미를 들인 사수가 얼마 전에 새로 '거대하게' 투자한 각도절단기가 이번에도 한몫을 톡톡히 해냈다. 가벽을 만들며 덕분에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여기에 쓰이는 목재들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폭이 좁은 각목을 '다루끼'라고 부르고 그 두 배로 폭이 넓은 각목은 '투바이'라고 부른다. 어쩔 수 없다.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풋내기 취급 당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바로 알아들어야만 한다. 이로써 오늘 조수의 사전은 한 페이지 더 늘었다.
뿌레카와 노미
나는 망치! 메이드 인 코리아! 난 국산 망치만 쓴다!아직도 남은, 마지막 폐기물을 치우러 갑니다.
자재를 나르다가 건물 안에 들어와 길 잃은 어린 참새를 구했습니다. 여기저기 더 부딪혀서 다칠까 봐. (괴롭히는 거 아닙니다. 작업 중이라 땀이 차서 장갑을 못 벗었답니다.)
"물 먹어. 물 먹어 봐"
한 생명 구해서 무사히 날려 보냅니다.
리아와 토리!
그 와중에도 낮에는 이집저집 다니며 소소한 집수리를 해내는 사수의 사진첩은 남의 집 동물농장이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