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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담긴 비밀

오, 나의 기사님!

by 햇살나무 여운


"기사님, 변기 뚜껑 좀 바꿔 주세요."


"기사님, 테이블 다리 좀 잘라 주세요."


"기사님, 세면대 물이 잘 안 빠져요."


"기사님, 여기 콘센트 벽은 언제 고쳐 주실 거죠?"


"기사님, 현관문이 시원하게 안 닫혀요. 도어 클로져가 이상한 것 같아요."


"기사님, 여기 구멍에 실 좀 끼워 주세요. 눈이 침침하네요."


이렇게 마르고 닳도록 부르는데도 내내 미루다가 설 명절을 코 앞에 두고 비수기가 되니 이제야 하나씩 슬그머니 해주기 시작하는 사수님! 그리고는 한 마디 덧붙인다. "입금하세요."


사수의 상호명에는 '기사'가 들어간다. 누구나 처음부터 쉽고 친근하게 부를 수 있게 하려고 아주 직관적이고 촌스럽고 단순하게 지었다. 무슨 무슨 홈케어나 홈닥터도 있고, 가끔 상상력을 발휘해서 연상해야 하는 창의적인 이름들도 많지만, 우리는 누가 봐도 집수리하는 기사님으로 알 수 있게 권위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도록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게 지었다. 대기업에서 하는 방식을 벤치마킹해서 당근마켓 비즈니스 플랫폼에서는 명함에 얼굴도 넣어서 내걸었다. 거친 일을 하더라도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는 호감이 가고 믿고 맡겨도 안전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년쯤 되면 인상이 곧 인성을 말해주기도 한다. 타고난 이목구비는 어쩔 수 없어도 눈빛과 표정은 어쩔 수 있다. 얼굴은 이름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책임이다.


"기사님!"은 집에 에어컨이나 세탁기를 새로 설치하거나 가전제품이 고장났을 때 서비스를 주로 부르는 여성 의뢰인들이 특히 익숙하게 부르기 좋고, 사장님보다는 기사님에게 뭔가를 부탁하고 문의하기가 심리적으로 덜 부담스럽기도 하니까. 집집마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도 워낙 많고 처음 보는 댕댕이도 냥이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수를 따르니 의심의 여지없이 "집사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묘하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참에 상호명을 바꿀까요? 간혹 비슷한 업종의 거래처 사장님들이나 의뢰인들이 착각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동등한 자영업자로서 같은 대표이고 '사장님'인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기사라고 하니 조금 친해졌다거나 자신보다 나이가 젊다고 하대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부하직원처럼 취급하려고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런 사람을 마주치면 정작 사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조수가 한술 더 떠서 쉽게 흥분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사수는 말한다. 세상에 열에 아홉은 그런 사람들인데 매번 상처받고 휘둘리며 똑같이 반응할 것 없다고. 그러려니 하고 차분하게 자신의 리듬대로 대응해 나가면 된다고.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좋은 자질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사회나 조직에서 그런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상처받고 꺾여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다고. 사수님은 그게 되시니 좋겠습니다. 조수는 아직 내공이 한참 부족하여 방구석에서나 겨우 큰소리치고 있습지요. 예, 예. 저는 안방여포 맞습니다.



기꺼이 드러눕고 불꽃쇼도 마다하지 않는 오, 나의 기사님!


누군가에게 기사는 그저 운전하는 드라이버(Driver)도 될 수 있겠고, 말 그대로 자격을 갖추고 전문기술로 이것저것 만들고 고치는 엔지니어(Engineer)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기기사나 토목기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조수만 알고 있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담은 한 가지의 기사가 더 있다. 영화에서 보면 백마를 타고 짠 나타나서 주인을 구하고 지켜주는 무사로서의 나이트(Knight 騎士)가 바로 그것이다. 조수에게뿐만 아니라 곤경에 처한 누구에게라도 사수가 도움의 손길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있고, 아서 왕의 엑스칼리버까지는 못 되어도 사수 역시 다양한 무기를 섭렵하고 있기도 하고. 그와 더불어 사수처럼 자신이 지닌 손과 몸으로 현장에서 기술을 발휘하여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존중은 받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생의 최전선에서 매일 힘써 싸우고 있는 그 사람도 누군가의 단 하나뿐인 '존 경(John 卿)'일 테니.


그리고 이름과 얼굴을 내건 이상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부끄럽지 않은 품격을 먼저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품위도 필요하고 격식도 중요하다. 아무리 아무 때나 이 집 저 집에 다니는 게 일이라고는 해도 그럴수록 때마다 제대로 눈 맞추며 인사를 명확하게 하고, 공간에 들어서기 전에는 주인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하루 종일 바삐 쫓아다니며 참고 참다 어쩔 수 없는 급한 용무가 생겼을 때에는 화장지를 쓰든 화장실을 쓰든 먼저 묻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예의이며, 머물렀던 자리는 마지막에 반드시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한다. 물 한 잔이든 커피 한 잔이든 건네주신 마음씀에도 빠뜨리지 말고 감사 인사를 챙길 일이다. 이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일을 구구절절 쓰고 있는 까닭은 나 자신부터도 의외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업에 대한 인식이 좀 더 성숙되길 바란다면 자신부터 노력하고 실천해야 한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 '그럼 그렇지. 기사들이 다 그렇더라.'가 될 수도 있고, '역시 전문가가 다르긴 다르더라.'가 될 수도 있다. 자긍심은 스스로 끊임없이 길을 내고 닦아 나가야 한다. 직위나 이름만 바라거나 내세우지 말고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


뒷짐 지고 물러나 자존심에 말만 앞세우기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먼저 나서서 거침없이 무릎을 꿇는 것은 물론이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리를 가리지 않고 드러눕기를 마다하지 않는, 존경하는 나의 사수님! 늘 수고가 많지만 남의 집만 고치지 말고 우리집도 좀 고쳐줘요. 우리집도 은근히 고칠 게 많답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우선순위를 잊으면 안 됩니다, 단 하나뿐인 나의 기사여!!


우리집에서 가장 고치고 싶은 곳


사수는 거래처에 돌릴 명절 선물을 택배가 밀리기 전에 일찍부터 준비한다. 여기저기 스타벅스 커피 쿠폰도 돌리고. 부동산 사장님들, 택배회사 대리님, 철물점 사장님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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