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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철활인

호두와의 대결

안희연 '호두에게'

by 햇살나무 여운



너의 단단한 진심
단호한 얼굴
너의 한결같은 속도
결코 작지도 가볍지도 않은
완전한 우주
고독을 견디며
깨뜨려지길 기다리는
너의 자세


어느 것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지

나는 도저히 너를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아


나는 물러터지고

늘 쉽게 속을 들키고

쉽게 흔들리고 으스러지고

깊지도 무겁지도 못해

고독은 도저히 못 견딜 것 같고


그런데 있지...

단 한 가지

딱 한 가지

난 있지...


돌이킬 수 있어


넌 한 번 깨지면

돌이킬 수 없지만

난 달라

언제든 몇 번이고

돌이킬 수 있어

그리고 난

깨뜨려지길 기다리지 않아

스스로 깨고 나올 거야

그게 나야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만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 안희연 '호두에게' 중에서









안희연 '호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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