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봄비를 맞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 갑자기 가늘게 비가 내렸지.
머리와 옷이 조금씩 젖어왔지만
급히 피할 수는 없었어.
지난가을
성긴 잎 미리 다 내려놓고
꾸부정한 어깨로 남았던 나무
고사목으로 치부했던 나무가
바로 눈앞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고 있었던 거야.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정신이 싸아했지.
머뭇대자 고목이 등 구부린 채 속삭였어.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어떻게 막겠나?
뭘 봬주려는 것 아니네.'
- 황동규 '봄비를 맞다' 중에서
꼭 누군가 보란 듯이 뭔가를 하려는 건 아니야
나는 다만 나를 좀 적시고 싶어
미처 제대로 펼쳐 본 적 없던 내 안에 나를
이제야 조금 틔우고 싶은 것뿐이야
아무래도 초유가 부족했나
젖떼기에 영원토록 실패한
늘 목이 마르고 사랑이 고픈 나를
마저 좀 적시고 싶어서 그래
살아온 내내 고단했어서 이제 그만 둘 법도 한데
봄비가 그치고 늘 이맘때가 되면
새살이 돋으려는 듯 어깻죽지가 간질거려
아직도 밀어낼 새 잎이 남았는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속살거려
그래서 그래, 그러니 좀 봐줘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을 마저 하려고
5월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