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강제퇴거 집행하다

마지막 퇴근을 함께하다

by 햇살나무 여운


크리스마스 징크스가 떠오른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역시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당일은 아니었지만, 그즈음 또 하수구를 뚫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왜 어김없이 이맘때일까? 아무래도 날이 추워진 까닭이 가장 크지 싶다. 뚝 떨어진 기온에 물도 얼고, 그동안 배관 속 깊이 웬만큼 쌓여있던 기름덩어리들도 더 단단히 들러붙어 길을 막을 확률이 높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동파방지를 위한 안내방송이 바쁘다. 심지어 하수구 배관이 얼어서 세탁기를 돌리지 못하는 아파트도 있는 모양이다. 주택은 말할 것도 없고 구축 아파트도 물론이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고가의 아파트도 다를 바가 없다. 실제로 지인 중에 한 분은 겨울마다 세탁기 배수호스를 안방 욕실까지 길게 길게 우회연장해 놓고 빨래를 한다고 한다. 아무리 첨단 AI 시대 어쩌고 저쩌고 해도 집집마다 당장 매일같이 해치워야 하는 살림과 생활은 여전히 몸으로 손으로 직접 움직여야 하는 아날로그 노동의 영역이다. 프롬프트 명령어만으로는 막힌 물길을 뚫을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배관 끝을 사람이 손으로 직접 감각해 가며 뚫어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춥고 배고픈 몸이 있고, 씻고 잘 수 있는 집이라는 물리적 세상에 살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도 이 사실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미국의 어느 백만장자가 말한 대로 배관공은 대체불가능한 미래지향적 직업이 될 수도 있겠다.


동파방지관리는 집 밖에서도 이어진다. 시설관리공단과 연계된 하청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공원에 수도꼭지가 얼어서 물이 샌다는 제보를 받았다며 확인하고 고쳐달라는 요청이었다. 직접 방문해 보니 수도꼭지가 동파로 파열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파를 방지하려고 설치된 부동전 수도꼭지에서 물이 한 방울씩 쪼르르쪼르르 흐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주민은 걱정이 되어 신고를 했는데, 정작 관리업체 직원은 부동전의 존재도 원리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한 곳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수와 조수는 갑자기 때아닌 공원순찰대가 되어 이 동네 저 동네 골목골목을 누볐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 직원은 왜 직접 자신들이 관리를 맡고 있는 공원에 한 번 나와볼 생각은 하지 않고, 따듯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서 전화로만 우리에게 명령어를 내리고 있을까? 하청에 하청에 또 하청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덕분에 바로 이곳에서 사수는 뜻밖의, 아니 뜻깊은 인연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공원들 중 한 곳의 현장을 지키던 관리원 아저씨의 마지막 퇴근을 함께 한 것이다. 정년퇴직 후 공원관리원으로 15년을 더 근무한 아저씨는 그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한 장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환한 미소로 물러나셨다. 그 마지막 순간에 다행히 혼자가 아니라 사수와 나눈 악수가 있어 조금은 덜 쓸쓸했기를.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에도 작업폐기물을 버릴 때마다 자주 마주치던 경비원 아저씨가 안 보이신다.


15년 근무한 장화




2주가 넘어서 그때 그 부동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아파트에서 비둘기를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던 바로 그 집이었다. 이사 들어온 세입자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조금 예민해진 상태였고, 부동산 사장님은 임대인과 계속해서 밀당을 거듭한 끝에 공동부담으로 해서 마침내 비둘기 똥을 치워주기로 결정이 난 모양이었다. 계속 연락이 없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결국 사수에게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많은 날들 중에 왜 하필 또 12월 31일이냐고!!!


지난번 크리스마스 샌드위치 연휴에도 어쩜 그렇게 고르고 골라 딱 한가운데 26일 불금 저녁 6시에 작업을 요청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번에는 다들 들뜬 마음으로 해돋이 보러 떠나는 마당에 우리는 새해 대신 새똥이라니! 왜 꼭 굳이 이날이어야만 했는가? 아... 뭘 더 바라겠는가... 내게 12월 31일은 없다고... 12월 32일이라고, 12월 33일이라고....


그러나, 거부할 수도 미룰 수도 없었다. 그 집에는 아기가 있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는 어여쁜 아기가. 세입자가 예민해질 만하다 싶었다. 세상 모든 것이 궁금한 아기는 곧 집안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닐 텐데. 털도 털이고 똥도 똥이지만, 조류 인플루엔자 뭐 그런 것도 있잖아! 어떡해! 어서 빨리 말끔히 안전하게 치워드려야지.


그런데 하필 또, 그날은 몹시도 추웠다. 최근 들어 가장 추웠다. 강추위가 지속된다는 안전문자가 계속 날아든다. 베란다 밖이라 춥기도 추웠지만, 작은 공간에 거대한 에어컨 실외기가 딱 맞춤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작업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비둘기 쫓으려다 거위털 패딩도 찢어 먹었다. 이건 어디다 청구해야 하나?


치우다 보니 알겠다. 시인의 말이 맞았다. 새똥은 차라리 깨끗하다. 게다가 추운 날씨가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오래도록 쌓인 배설물이 낚시 떡밥처럼 덩어리째 꽁꽁 얼어서 치우기는 훨씬 수월했다. 더 큰 문제는 철망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고도로 사회화된 까마귀, 까치, 비둘기는 워낙 영악해 작은 구멍이라도 비집고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며 사수는 이리저리 한참을 궁리했다. 그나마도 없는 공간에 몸을 겨우 겨우 구겨 넣어가며 철망을 넣었다 뺐다 열 번 넘게 시도한 끝에 사수는 마침내 쥐도 새도 못 들어올 만큼 바닥 끝까지 촘촘히 설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월세도 내지 않고 문간방에 오래도록 무전취식을 일삼던 비둘기댁은 무등기 무허가 둥지에서 내몰렸다. 미안하다, 비둘기야.




2미터 60 센치가 넘는 거대한 탁자! 차에도 안 실린다.
먼지가 일까봐 장비도 못 쓰고 순수 손톱질로 썰고 뽀개기! 31일도 결국 야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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