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엄마가 처음이었기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아이가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걸 자주 보며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엄마의 손위 올케, 그러니까 내 외숙모도 비슷한 시기에 아들을 낳았는데, 오빠보다 정확히 두 달 먼저 태어났다.
어느 날, 외할머니가 손자들 둘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뭔가 이상하다. 쟤네 둘을 비교해 보면 두 달 차이밖에 안 나는데 뭔가 다른 것 같아. 얼른 병원에 데려가 봐라."
그때 엄마의 나이는 고작 스물일곱이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나이에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절절한 기도에도, 엄마가 믿는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의사는 아이에게 지적장애가 있다는 잔인한 진단을 내렸다. 엄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앞이 깜깜해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그때부터 더욱더 엄마가 믿던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교회로 가서 눈물로 기도를 했다.
'아이가 무사히 잘 자랄 수 있게 해주세요. 이 고난을 잘 헤쳐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 와중에도 지적장애가 있는 오빠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고 한다. 교회의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빴고 엄마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도를 하면서도 동시에 오빠를 케어하기에 바빴다. 엄마의 마음은 매일 조금씩 더 무너져 내리고 있었지만, 그 마음을 추스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한편, 아버지는 지금도 그때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어린시절 할아버지의 사랑을 전혀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꿈은 언제나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의사의 그 한마디로 아버지는 평생의 꿈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기에 그 당시에는 아무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단지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일에 매달렸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한 말이지만, 아버지도 그때 느꼈던 절망적인 감정은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하셨다.
집은 가난했지만 그렇다고 자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월급이 25만 원이던 시절, 그 월급의 절반 이상을 오빠의 '특별한 교육'을 위해 사용했다. 아버지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출근과 야근을 반복했고, 엄마는 서울 한복판에서 지하철을 타고 매일같이 서너 시간을 오가며, 오빠가 '특별한 교육'을 받도록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오빠는 이동 중에도 가만히 있지 않아, 지하철과 탑승구 사이의 틈으로 신발을 자주 빠뜨리곤 했다. 한 번은 엄마가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철로에서 오빠가 빠뜨린 신발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길로 엄마는 역무원에게 가서 긴 막대기를 구해 철로 위에 떨어져 있던 그 신발을 건져냈다.
신발값이 아까워서, 그마저도 버릴 수 없어서.
엄마의 눈물과 절망, 아버지의 가정을 위한 헌신,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끈질긴 사랑이 결국 가족을 지켜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