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어리둥절 빙글빙글 모두가 정신이 없네-짐멜의 대도시와 정신적 삶
이 연재글의 1장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바야흐로 도시의 시대이다. 전 세계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도시에 거주하고 있고, GDP의 80%가 도시에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영향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 국가 지도자들이 개최하는 정상회의가 2010년부터는 도시 수준으로 확장되어, 세계도시 정상회의 시장 포럼(World Cities Summit Mayors Forum, WCSMF)이 열릴 정도이다. 이러한 도시의 영향력이 증대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대도시(megalopolis)와 메가시티(mega city)이다.
국가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대도시는 100만 명 이상의 도시를 말한다. 국내에서는 940만의 서울과 340만의 부산은 물론 107만의 고양시도 대도시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도시의 주변 생활권을 포함한 대도시권 중 인구 천만 명 규모의 도시를 메가시티(mega city)라고 지칭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까지 서울, 인천,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메가시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는 3,800만의 도쿄 대도시권, 2,375만의 뉴욕 대도시권, 1,855만의 LA 대도시권, 1,383만의 런던 대도시권이 있다. 서울의 경우, 단독으로도 거의 메가시티급 도시이지만, 인접한 김포, 고양, 양주, 의정부, 남양주, 구리, 과천, 하남, 성남을 서울 대도시권에 포함시켰을 때 대략 1,392만 명으로 런던 대도시권보다 더 큰 규모의 메가시티가 될 전망이다.
이런 대도시 혹은 메가시티는 인구의 집중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기능의 집적으로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뉴욕 경제가 무너지면 세계 경제가 위험에 빠지고, LA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 상황에 따라 세계 문화 산업의 판도가 바뀌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메가시티는 현재 47개 정도로 파악되는데, 빠르게 도시화되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신흥 대도시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대도시와 메가시티가 생겨날 것이라 예상된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인 도시를 넘어 거대한 대도시가 세계적 트렌드가 되고 있는 대도시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과 차원이 다른 대도시의 힘 아래, 우리 사회가 큰 변화를 경험할 것은 확실하다. 과연 대도시는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오늘 만나볼 사회학자의 렌즈로 대도시와 대도시에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관찰해 보자.
오늘은 대도시에 대해 중요한 사회학적 해석을 한 게오르그 짐멜(G. Simmel)을 만나본다. 흔히 고전사회학의 3대장을 마르크스, 베버, 뒤르켐이라고 한다. 짐멜 역시 이 세 사람에 뒤지지 않게 현대 사회학 정립에 크게 기여한 학자이기에 짐멜까지 포함하여 고전사회학의 사천왕이라 하기도 한다. 줄여서 맑베뒤짐.
짐멜은 지난 연재글에서 다룬 워스의 지도교수 로버트 파크(R. E. Park)의 스승이다. 짐멜의 도시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은 파크에게, 그리고 워스에게 전달되어 도시사회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짐멜의 대도시에 대한 통찰은 그의 생애와도 큰 관련이 있는데, 짐멜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활동한 학자이다. 그가 한창 활동할 당시 베를린은 근대 도시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베를린의 급격한 사회변동과 삶의 변화를 몸소 겪은 짐멜은 대도시를 이전의 사회와 구별된 근대성(modernity)의 거점지로서 연구했다. 그가 1903년에 집필한 에세이 ‘대도시와 정신적 삶(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에는 이러한 그의 관점이 잘 녹아있다. 짐멜은 화폐경제, 유행, 이방인 등 대도시의 특성에 따라 변화된 정신적 삶을 관찰하였다.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화폐경제가 대도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근대성의 기반이 되는 화폐는 단순한 교환수단을 넘어 모든 것을 수평화하는 등가물 역할을 한다. 서울대학교 한 학기 학비가 치킨 200마리로 간단하게 비교될 수 있듯, 아무리 상이한 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해도 화폐경제는 모든 것을 비교 가능한 보편적인 양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다.
이러한 화폐의 특성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화폐경제는 이전에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던 각종 관계를 해체하고, 사람 간의 관계를 경제적 이해 아래 돈을 주고받는 계산적, 보편적 관계로 변화시켰다. 즉, 각 사람의 인격이나 고유한 개성에 상관없이 화폐 가치를 통해 인간관계가 계산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노동조차 노동자의 개개별 특성보다 일면적인 성과를 기준으로 한 시간당 임금으로 계산된다. 과거에는 친분에 따라 일을 부탁하기도, 부탁받기도 하였다면 이제는 돈만 있으면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굳이 특정한 삶의 공동체에 결합되거나 얽힐 필요 없이 화폐만 있으면 누구나 수많은 의무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화폐경제가 근대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을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평등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수평화시키는 ‘비천한’ 화폐의 성질은 수단에 불과했던 화폐를 목적 그 자체로 전도시키는 비극을 야기했다. 돈으로 뭘 하겠다기보다는 그냥 돈 자체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된 것이다.
경제적 교역이 활발한 대도시는 이러한 화폐경제의 본거지이다. 대도시에서 화폐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관계는 우리가 교류하고 상호작용하는 대상들을 자주 바뀌게 한다. 지불하는 비용에 걸맞은 효용을 제공한다면 대도시 사람들에게는 아웃백스테이크의 담당 서버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이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중요한 것이 각 사람과의 유대감 혹은 정서적 관계가 아니라, 화폐로 결정되는 객관적으로 평가 가능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사람의 가치도 돈으로 환원해 계산하는 것이다. 사람도 돈으로 따지는데, 사물은 어떠하랴! 대도시의 사람들은 마주치는 모든 것을 화폐로 계산하고 환원하는 데 신경을 기울이게 되었다. 도시를 지나다니며 "저 차는 얼마일까?", "저 치킨집에서는 치킨 2마리를 15,000원에 파네.. 싼 건가?" 등등 우리의 생각은 돈을 타고 흐른다.
그 결과, 소도시나 시골과 달리 돈의 흐름이 활발한 대도시의 환경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극을 준다. 너무나 많은 자극들에 노출된 대도시의 사람들은 신경과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변화들에 감정적인 반응이 아닌 이성적인 태도로 둔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대도시에서 만들어지는 온갖 자극에 하나하나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미쳐버릴 것이다!
더 나아가, 대도시에서는 화폐경제를 기반으로 한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와 업무들이 얽히고설켜 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정확성, 시간, 약속이 중요시된다. 주식 시장이 장 마감이 오후 3시 30분이라는데, 시간의 개념을 모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주식시장에서는 유도리 있게 +- 5분 정도만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다 한들 씨알도 안 먹힌다. 이로 인한 정확성, 시간, 약속에 대한 강박증은 대도시 사람들의 계산적인 정신세계에 기여한다.
화폐경제로 인해 수많은 자극과 계산이 오가는 대도시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정신건강을 지키기 위해 계산적이고 냉담한 태도를 가지며, 새로운 자극들을 공허하게 받아들이는 둔감함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도시는 당연히 개인의 고유한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기 어려운 환경이다. 인간관계가 깊지 않고 자주 바뀌므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개성을 각인시키기 어렵다. 또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수평화되는 비인격적 사회에서 개개인의 특성은 보편성, 객관성에 묻히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대도시의 사람들은 유별난 행동, 개성, 멋 부리기, 과장 등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주목받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게 된다. 이때 유용한 것이 유행이다.
유행은 한 사회에서 검증된 가치를 모방한다. 그렇기에 유행을 따르는 것은 사회 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와, 동시에 차별화되고자 하는 욕구를 함께 만족시킨다.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센스를 갖추었으면서 남들과 어울릴 줄도 알아야 대도시에서 개성과 소속감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즉, 유행이란 짐멜의 말처럼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이다. 물론 유행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널리 퍼지게 되면 더 이상 유행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다. 그렇기에 상류층의 경우, 항상 새로운 유행을 주도하며 그들을 따라 하려는 낮은 신분의 계층과 구별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유행은 대도시에서 매몰된 개성을 나름대로 뽐내면서 사회적 유대감을 얻고자 하는 대도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요소인 셈이다.
짐멜이 대도시를 관찰하며 다루는 또 다른 연구 대상은 이방인이다. 짐멜의 말에 따르면 이방인은 가까우면서 먼 존재이다. 이방인은 다른 사람들과 보편적인 특성들은 공유하지만 친족 관계, 특정 지역에서의 삶의 방식, 친분을 유지하면서 얻어지는 개별적인 요소는 공유하지 않는다. 즉, 이방인은 보편적 차원에서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가까운 존재이나, 특별하고 인격적으로 연결되지 않기에 멀리 떨어진 존재인 것이다. 대도시는 대표적으로 상인을 포함해 도처에서 이방인들이 몰려드는 공간이다. 사람들 간의 비인격적 관계, 보편성, 객관성에 기반하는 대도시의 삶에서 이방인은 대도시의 특성과 가장 잘 어우러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대도시라는 공간에서 도시의 사람들은 이방인과 교류하고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화폐, 유행, 이방인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대도시의 특성은 결국 인간관계에 냉담하고 자극에 둔감한 성격, 속하고 싶으면서도 구별되고 싶은 마음, 모르는 사람과 섞여 경험하는 낯섦을 비롯한 도시인 특유의 정신적 삶을 형성하였다.
짐멜이 세심하게 관찰한 대도시의 정신적 삶에 어울리는 신조어가 있다. 바로 ‘차도남’이다. 차도남은 차가운 도시 남자의 줄임말이다. 김 씨도 즐겨봤던 웹툰 ‘마음의 소리’에서 2008년에 처음 등장한 신조어로 지금은 이미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차도남의 특징이라고 하면, 차가운 성격이지만 내 사람은 은근히 잘 챙기는 세심함, 시크한 옷차림과 외모, 일과 자기관리에 엄격하고 이성적인 태도 등이 있다. 이러한 차도남 컨셉은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의 속성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왜 따뜻한 도시 남자가 아닌 차가운 도시 남자일까? 화폐경제에 기초한 대도시가 전달하는 엄청난 자극을 견디려면 차가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행에 따른 시크한 옷차림과 외모는 대도시에서 ‘나’라는 사람이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일과 자기관리에 엄격한 것은 낯선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인격보다 기능적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대도시에서의 생존법이 아닐까. 차도남만큼 대도시의 정신적 삶을 잘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 있을까?
우리는 대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차도남, 차도녀, 따뜻함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도시인이 되어 간다. 이러한 현상은 짐멜의 ‘문화의 비극’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짐멜에 따르면 인간은 창조성을 발휘하여 예술, 철학, 과학, 제도 등 문화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가 복잡해지고 표준화됨에 따라 인간은 점점 문화를 이해하고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더 나아가 역설적으로 창조물인 문화가 창조자인 인간을 지배하는 순간까지 오게 된다. 쉬운 예로, 스마트폰은 인간의 혁신성이 집약된 문화적 산물이지만, 스마트폰이 없어지면 우리는 그 즉시 바보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만들어낸 스마트폰에 지배되고 있다. 짐멜은 이렇게 인간의 창조성과 자율성이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에 지배되는 상황을 ‘문화의 비극(tragedy of culture)’이라 불렀다.
문화의 비극이 일어나는 무대가 바로 대도시이다. 다양한 사람이 함께 협력하여 거대한 대도시를 만들어냈지만, 대도시는 점점 우리의 정신적 삶을 옥죄고 있다. 우리가 만든 대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 차가운 도시인으로 변해가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메가시티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거대한 대도시를 만들려 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메가시티에서 대도시의 비극을 비껴갈 수 있을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국가 간의 경쟁이 곧 도시 간의 경쟁이 되면서 메가시티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포가 쏘아 올린 '메가시티 서울'에 대한 찬반이 정치권으로 번지게 되었고, 고양시, 구리, 하남 등 서울에 인접한 다른 도시들까지 들썩이며 한창 메가시티의 가능성과 현실성이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메가시티는 분명 장점이 있다. 일단 지금 서울로 편입을 논의하고 있는 서울 인접 도시들은 사실상 서울생활권에 포함되어 있다. 메가시티 서울의 시발점이 된 김포의 인구 12.7%는 이미 서울로 통근하고 있다. 김 씨의 고향인 고양시 역시 15.1%가 서울로 통근 중이다. 구리와 과천은 19%대, 광명과 하남은 무려 인구의 20% 이상이 서울로 통근한다. 사실상 서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고 봐도 무방한 수치인데, 행정구역이 달라 행정적인 비효율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주민 편의를 위해 서울과 교통 연계를 개선하려고 해도 수많은 행정적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메가시티 서울이 현실화되면 서울생활권 내에서 불필요하게 중복되던 예산과 행정 비용이 감소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규모가 커지는 만큼 도시의 기능도 다양해진다. 서울의 경제·정치적 기능에 김포의 항구, 고양시의 대규모 택지, 과천의 정부 기능 등 분산되어 있던 기능들이 메가시티로 통합되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도시로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메가시티에 대한 논의에서 도시에 살아가는 정신적 삶에 대한 고려는 아직 빠져있다.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 사람들의 10% 정도는 본인의 정신건강이 좋지 않은 편이라 생각하고 있다. 메가시티는 분명 더 많은 인구의 집중과 경쟁과 자극, 인간관계의 파편화 등 도시인의 냉담한 심리상태와 피곤한 일상을 형성하여 정신적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여지가 충분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메가시티에 대한 논의의 주 관심사는 경제, 교통에 머물러 있다.
'서울에 가면 눈 뜨고 코 베인다’나 '세계에서 가장 바쁜 도시, 뉴욕’과 같은 말이 있듯이 이미 우리가 살아가는 대도시는 배려,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대도시는 이제 메가시티로 한 단계 더 진화를 예고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의 대도시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이고,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엄청난 경제적 부와 정치적 힘을 가지게 될 메가시티는 우리의 삶에 희극일까 비극일까? 대도시에 살아가면서 오늘도 지하철에서 휴대폰 화면만 끊임없이 쳐다보는, 나와 비슷한 옷차림의 사람들을 애써 외면하는, 그리고 알게 모르게 사람을 화폐로 대하는 우리들에게 짐멜은 메가시티의 비극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 같다. '메가시티의 비극'을 막기 위해 오늘만큼은 돈보다 사람을 먼저, 유행보다 내 만족을 먼저,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제보다 배려를 먼저 생각하는 대도시인이 되어보면 어떨까.
짐멜은 1858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베를린 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1881년에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짐멜은 그 특유의 지성과 통찰력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수많은 논문과 책을 집필하였다. 이에 따라 학계에는 자연스럽게 그의 명성이 퍼지게 되었다.
짐멜은 이전과 달리 역사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시대를 정확히 포착한 사회학자였다. 마르크스 류의 사회이론이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근대성을 다루려 한 것에 반해, 짐멜은 화폐경제와 대도시의 시대라는 거대한 흐름은 물론, 그 안에서 유행, 이방인, 장신구처럼 하찮고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상의 것들도 놓치지 않았다. 짐멜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넘나들며 섬세한 관찰력으로 과거와 다른 근대성의 대표적인 모습들을 설명하며 현대 사회학의 정립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본인의 뛰어난 재능은 물론, 동시대의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당시 반유대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로 인해 짐멜은 그의 고향이자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 베를린에서 끝내 교수 자리 하나 얻지 못했다.
1914년 짐멜은 결국 베를린을 떠나 마이너급 스트라스부르크대학에서 정교수 자리를 겨우 얻었지만, 베를린을 떠나온 짐멜은 그곳에서 이방인일 뿐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14년에 세계1차대전이 터지며, 강의실이 군 병원으로 바뀌고 학생들이 징집되어 교수로서의 생활도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못했다. 결국 1918년 9월, 세계1차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짐멜은 그가 사랑한 베를린이 아닌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인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한계 때문에 평생을 학문적 아웃사이더로 살다 갔지만, 그의 학문은 미국인 제자들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학파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 사회를 해석하는데 그의 통찰력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비극이었지만 그의 학문은 희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