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생긴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모두 친구 - 베버와 하버마스의 합리성
뉴스를 보면 ‘스마트도시계획’, ‘도시재생전략계획’, ‘도시·주거환경정비기본계획’ 등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늘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 도시가 치킨이라면 계획은 맥주이다. 늘 함께 움직이는 관계라는 뜻이다. 도시와 계획을 합친 '도시계획'은 지금껏 우리 도시의 풍경을 많이 변화시켜 왔다. 강남이나 일산·분당은 모두 계획적으로 개발되었고, 우리에게 익숙하던 광화문광장의 모습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추진계획으로 달라졌다. 집을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놓고, 학교와 일터를 놓는 일은 모두 다 계획대로이다. 그만큼 도시계획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것이다. 그래서 도시계획이라는 것은 뭐고 왜 탄생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조금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언제냐면 바로 근대도시의 여명기 때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멋진 도시의 발전은 유럽에서 발생한 18세기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겪고 나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은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산업구조 전환과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확산을 가져왔고, 프랑스혁명은 계급제를 철폐하고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다. 이 두 혁명 이후 자본가들은 곳곳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공장을 지었고, 자유가 된 농노들은 먹고살기 위해 그 공장으로 몰려들게 된다. 이렇게 공장과 사람이 몰려들며 공업도시가 형성되었는데, 산업혁명의 본산지 영국의 리버풀, 맨체스터, 글래스고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인구집중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한 도시에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도시문제’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주택, 하수시설, 보건시설 등의 인프라와 치안, 보건, 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도시는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된다. 일을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온 노동자들은 매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나 제대로 잠을 청할 쾌적한 집이 없었고, 위생 문제로 인한 도시의 질병, 통제되지 않는 범죄, 공동체성의 상실, 빈부격차 등으로 처참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러한 도시문제로 인해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하였다. 사회학의 3대장이라 불리는 뒤르켐(E, Durkheim), 마르크스(K. Marx), 베버(M. Weber)와 같은 고전사회학자들은 처참한 근대 도시를 바라보며 이전과 확연히 다른 사회현상을 설명할 이론과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사회학과 마찬가지로 도시계획학도 바로 이런 도시문제로 인해 탄생하였다. 일단 ‘계획’이란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수립되는 것이다. 심각한 도시문제를 마주한 근대 도시는 도시문제들에 대처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도시를 ‘계획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생겼다.
도시계획은 종합적 관점과 공공성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도시가 토지, 건물, 인프라와 같은 물리적 측면과 정치, 경제, 복지, 문화 등의 사회적 측면으로 이루어진 만큼, 도시계획은 이 두 측면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수단이다. 더불어, 도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간다. 그렇기에 도시계획은 국가와 같은 공공부문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입하는 ‘공공성’을 띄고 있다. 이를 종합해 봤을 때, 도시계획이란 공공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여,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거대한 혁명을 겪은 뒤, 도시문제와 사회적 혼란의 온상이었던 프랑스 파리가 이러한 초기 도시계획을 살펴보기 좋은 예시이다. 파리에서는 1853년부터 일찍이 도시계획이 수립되었다. 파리 시장으로 임명된 오스만 남작은 중세시대의 유산으로 남겨진 좁은 도로, 비위생적 환경, 교통체증 등의 도시문제를 겪고 있던 파리를 정비하여 도로 폭을 넓히고, 상하수도를 재정비하였으며 가스 가로등과 녹지 조성으로 도시의 생활환경을 개선하였다. 길이 넓어지자 유사시 경찰력 투입이 신속해졌고, 도시 생활환경 개선으로 시민들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파리의 도시계획은 물리적 공간 개조뿐만 아니라 사회적 혼란을 제어하는 종합적인 국가주도의 공공계획이었던 것이다. 당시 파리 도시계획의 결과는 현재 파리 모습의 뼈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도시에 꼭 필요한 도시계획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도시계획가들은 도시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계획이론’이 필요했다. 학자들마다 관점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바로 도시문제로부터 함께 태동한 ‘사회학’으로부터였다. 오늘은 특히나 도시계획학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학자 두 명을 만나, 그들의 렌즈로 도시계획을 관찰해 보도록 하자.
오늘 만나볼 사회학자는 사회학계를 통틀어 GOAT으로 불릴만한 막스 베버(Max Weber)와 현존하는 Living Legend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이다. 도시의 맥도날드화를 다룰 때 잠깐 만났던 베버는 근대사회를 합리성의 증대로 바라보며 후대 사회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하버마스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전통을 계승한 사회학자이다. 비판이론은 비판 없는 사회가 결국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고 보고, 비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이론이다. 이 두 사회학자는 사실 ‘도시계획’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그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킨 적은 없다. 하지만 ‘도시계획을 어떻게 할까?’에 대해 고민하던 도시계획학자들이 이들의 이론을 빌려 도시계획학에 심었고, ‘합리적종합계획(comprehensive rational planning)’과 ‘의사소통적계획(communicative planning)’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베버의 합리성(rationality) 개념으로부터 가장 먼저 주류 계획이론으로 떠오른 합리적종합계획부터 살펴보자. 베버는 지난번에 다뤘듯이, 이전 사회와 근대 사회의 가장 큰 차이점을 ‘합리성’으로 꼽았다. 합리성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의 수단을 고려하는 행위에 기반한다. 즉,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면 어떤 수단을 선택해야 하고,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만들어질 것인지 예측하고 계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합리성이 지배하는 근대 사회에서는 세습되는 계급이나 왕권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만들어진 법적 정당성에 기반한 근대 국가(modern state)가 발전하게 되었다. 베버는 이러한 근대 국가를 합법적으로 경찰, 군대 등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하고 영토 내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러 조직들의 집합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만 봐도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국영기업, 국영방송, 국립대학, 감옥 등 여러 조직들이 국가라는 틀 안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으며, 국가의 중대한 사항을 결정하듯이 말이다.
관료제는 이러한 근대 국가의 조직들을 가장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조직 체계이다. 베버에 따르면 이상적인 관료제는 관료제는 위계질서에 따라 권위가 부여되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세분화하여 분담하며, 다른 그 어떤 요소보다도 실적에 의해 평가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관료제는 전문성 있는 엘리트 관료들이 더 많은 권위를 가지고 규칙에 따라 명령을 하달하여 가장 효율적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베버의 합리성과 근대 국가관, 관료제는 실용주의 정신과 결합되어 합리적종합계획의 이론적 근간이 되었다. 합리적종합계획은 공공부문의 주도로 공익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전문성에 기초하여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우러 져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전문성을 갖춘 관료들에 의해 합리적종합계획은 위에서 아래로의 하향식(Top-Down)으로 실현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시카고와 같이 합리적종합계획 방식으로 형성된 도시들은 빠르고 효율적으로 도시성장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합리성을 추구한다고 그 결과까지 합리적이라는 보장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항상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는 것은 이상에 가깝기 때문이다. 정치중립적이어야 하는 관료들이 전문성과 효율이 아닌 정치적 차원에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향식의 합리적종합계획은 공공성을 왜곡하여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익을 반영하지 못한다. 더불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오히려 수단이 목적보다 우선시 되는 경향도 있다. 실제로 지역의 관광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려보다, 그냥 테마파크 하나 짓는 행위 자체를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나친 합리성의 추구는 목적의 가치에 대한 고민 없이 수단에만 매몰되어 비합리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베버는 이러한 상황을 '쇠우리(iron cage)'라고 표현하며 경계하였다. 쇠우리에 갇힌 것처럼 합리적종합계획으로 인해 달성해야 할 목적의 의미는 사라지고 수단적인 행위만 남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비판과 함께 새로운 계획이론의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에 근거한 의사소통적계획이다. 베버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하버마스는 그동안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합리성을 ‘도구적’이라고 비판했다. 목적 달성의 가치와 정당성에 대한 고민 없이 합리성이 그저 도구처럼 수단으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도구적 합리성을 보완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제시하였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으로 서로에 대한 상호이해에 기반한 사회구성원들의 합의를 지향한다. 이에 따라 하버마스는 공론장(public sphere)의 역할을 강조한다. 공론장이란 사람들이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고, 평등하게 토론하며, 합리적으로 견해의 차이를 줄여 합의를 이룰 수 있는 공적 영역이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사회 문제에 대해 활발히 토론하던 카페가 공론장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근대 사회에서 관료제가 확대되고 소수의 관료들에 의해 의사결정이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공론장의 역할이 퇴색되기 시작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을 부활시키고,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통해 다양한 이해관계와 의견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에서 합의를 이루고 공동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토대로 하는 의사소통적 계획은 도시계획에 있어서 참여, 대화, 토론, 협력 등의 가치를 강조한다. 국가 중심의 하향식 접근 방식과 관료제에 의해 반영되지 못했던 실제 주민들의 생각과 공공 문제를 충분히 토론하여 합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사소통적계획은 전문가가 아닌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아래에서 위로의 상향식(bottom up) 방식을 추구한다. 최근 도시계획에 대한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는 공청회나 주민참여형 도시재생 등이 바로 이런 예이다.
당연히 이러한 의사소통적계획에도 맹점이 존재한다. 일단, 현실세계에서 의사소통은 여전히 권력에 의해 비대칭적이다. 석사 나부랭이인 김 씨의 주장보다 교수님의 주장이 더 타당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또한, 사회구성원들의 의견을 다 취합하고 반영하여 행동에 옮기는 과정 자체에도 시간적, 경제적 비용이 많이 든다. 더불어, 각 집단이 서로의 이익만을 대변하여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도시계획의 공공성을 훼손할 가능성도 있다. 잘못하면 전문성과 상관없이 머릿수가 더 많은 집단이 원하는 대로 의사결정이 진행되는 것인데, 이는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방향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 근대화 시기의 국토개발, 이후 신도시 개발 등 주로 합리적종합계획으로 도시가 형성되었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함께 최근에는 시민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의사소통적계획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이제 우리나라 서울의 사례를 살펴보며 합리적종합계획과 의사소통적계획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가 보자.
현재 서울은 명실상부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서울의 시장은 차관급 대우를 받는 다른 광역자치단체장들과 달리 유일하게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이는 서울시장의 영향력이 단지 한 도시 영역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전국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서울의 도시계획은 전국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
14대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 시장과 35대에서 37대까지 3번이나 서울시장으로 선출됐던 박원순 시장은 그들의 연배, 활동시기, 정치 성향, 사회적 배경이 달랐던 만큼 서울의 도시계획에 있어 큰 차이를 보였다. 김현옥 시장이 합리적종합계획으로 서울의 틀을 잡은 사람이라면, 박원순 시장은 의사소통적계획으로 시민이 참여하는 서울을 구상했다.
먼저, 김현옥 시장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시장으로 재임했다. 1960년대 서울에는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갑작스러운 인구과밀은 주택난, 인프라 부족, 범죄, 빈부격차 등 여러 도시문제를 일으킨다. 기존 서울의 시가지와 인프라만으로는 엄청난 인구 유입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서울의 도시공간구조를 대개조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966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으로 임명된 김현옥 시장이 도시문제 해결과 서울의 현대화는 목표 달성을 위해 서울에 등판하게 된다.
김현옥 시장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1년 5.16 군사정변에 가담하였다. 준장으로 예편한 이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부산시장으로 임명되면서 관료 커리어를 시작하였다. 부산시장에서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 시장은 빠르게 서울의 면면을 변화시켰다. 김현옥 시장이 실행한 서울의 대개조 사업은 세종로와 명동 지하도 건설, 세운상가 사업, 강변북로 건설, 여의도 개발, 고가도로 및 터널 건설, 시민 아파트 건설이 있다. 이런 굵직굵직한 사업들에 지지 않는 김현옥 시장의 작품은 바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수립’이었다.
1966년 재임 직후 수립된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은 서울의 도시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고, 발전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김현옥 시장의 서울 도시기본계획은 목표 연도를 1985년, 계획인구 500만 명으로 설정한 장기적 발전 계획이었고, 토지이용과 같은 물적계획과 산업 육성 같은 사회경제적 계획이 합쳐진 서울시 최초의 종합계획이었다. 물론 목표인구인 500만 명을 1970년에 가볍게 넘어 수정이 불가피했지만, 김현옥 시장의 서울 도시기본계획은 도시의 기능 분산, 가로망 체계 구상, 주거지 정비, 토지이용계획 등 현재 서울의 뼈대가 되었다. 특히, 행정부는 광화문, 입법부는 영등포, 사법부는 영동(현재 강남 지역)에 분산배치한다는 김현옥 시장의 계획은 지금 서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현옥 시장이 합리적종합계획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서울 도시계획은 합리적종합계획과 많이 닮아있다. 우선 김현옥 시장의 서울 도시계획은 군인이자 관료 출신이었던 김현옥 시장의 강력한 하달식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의 도시문제 해결과 서울의 현대화라는 목적을 가진 서울 도시계획은 서울시 관료들의 의해 빠르게 집행되었다. 더불어, 눈앞의 서울이 아니라 미래의 서울을 그리는 장기적인 종합계획으로 물리적, 사회적 측면을 모두 고려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목적을 위해 행위가 도구화되는 합리적종합계획의 맹점은 김현옥 시장도 피해 가지 못했다. 서울의 미관을 개선한다는 목적 달성을 위해 마찬가지로 ‘서울시민’이었던 무허가 주택 거주자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김현옥 시장은 이렇게 철거된 판자촌 위에 시민아파트를 지었는데, 여기에 와우아파트도 있었다. 김현옥 시장은 청와대를 의식하여 공사도 힘들고, 안전성도 떨어지는 마포구 와우산 기슭에 와우아파트를 지었고, ‘6개월’만에 완공되었다. 안정적인 관료제의 핵심인 정치중립성을 잃어버린 채 목적 달성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빨리빨리’ 정신이 만나 1970년 와우 아파트 붕괴 사고라는 비극을 초래했다. 와우 아파트 19개 동 중 1개 동이 붕괴되어 74명의 사상자와 현재 가치 1,000억 이상의 재산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합리적종합계획 방식 아래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서울의 도시문제를 해결하고 미래 서울의 틀을 구성하며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던 김현옥 시장은 결국, 비합리적인 인재(人災)로 1970년, 서울시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41년 동안 19명의 시장을 거쳐 2011년에는 박원순 시장이 35대 서울시장이 되었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장 재임 이전,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를 설립하는 등 시민운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무상급식 실시 문제로 시장직을 건 오세훈 시장의 사퇴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였고, 안철수 후보의 지지선언으로 낮은 지지율의 한계를 뚫고 서울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배경과 맞물려,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 도시계획의 중심도 점점 관 주도에서 시민 주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원순 시장은 그동안 도시계획가와 관료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도시계획을 도시에 살아가는 다양한 시민들의 합의를 통해 수립하고자 하였다. 2016년에 선포된 ‘서울 도시계획 헌장’에는 ‘도시계획 수립과정엔 시민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라는 문장이 실려있다. 이 헌장에 따라 수립된 2030 서울 도시기본계획에는 시민, 전문가, 공무원 등 109명의 도시계획 주체들이 참여하여 의견을 수렴하였다. 2030 서울 도시기본계획에서 등장한 생활권 계획은 본인의 생활 현장에 대한 도시계획을 시민들이 직접 수립할 수 있도록 140여 개 지역생활권별 각 30~50명이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었다. 이외에도 박원순 시장은 시민단체를 지원하면서 시와 시민들의 협력적 거버넌스(공공경영)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박원순 시장의 기조에 따라 이전 시장들과 비교했을 때, 도시계획 사업은 복지와 도시재생 위주로 진행되었다. 서울로 7017, 골목길 재생사업, 각종 수당 지급, 올빼미버스가 그 예이다. 도시계획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실제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상향식으로 도시를 변화시키려고 했던 점으로 보았을 때 박원순 시장의 도시계획은 의사소통적계획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사소통적계획이 다양한 문제점을 초래하듯, 박원순 시장의 도시계획에도 여러 문제점이 있었다. 먼저, 실제 거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한다는 낙후지역 도시재생은 단지 재개발을 막고 벽화 몇 개를 그리는 정도로 끝났다. 아무것도 바뀐 것 없이 벽화만 그려진 도시재생의 결과에 만족할 주민들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허울 좋은 도시재생 사업을 위해 특정 시민단체에 일감을 몰아주었다는 의혹도 있다. 서울에는 여러 수많은 시민단체가 존재하지만, 편향된 지원은 시민 모두의 의견을 반영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더 나아가 박원순 시장의 시민 참여형 거버넌스 사업에 시민들이 참여는 했지만 실제 정책에는 시민들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였다. 박원순 시장이 박원순 시장이 시민 대토론회, 지역주민 면담 등 오랜 기간 시민들의 의견 수렴에 힘썼지만, 박원순 대통령 사후인 2021년 서울 시민 대상 여론조사에 따르면 광화문 재구조화 사업을 모로고 있는 시민 비율이 44.4%나 되었고, 사업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56.7%였다. 시민 의견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은 이해하지만, 많이 아쉬운 반대 비율이다. 시민들 절반 이상은 원하지도 않았는데 변화된 광화문광장 모습에 적응해야만 한다. 시민 의견 수렴한다고 예산은 예산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들었으나 얻은 것은 없었던 셈이다.
35대, 36대, 37대 3선에 성공한 박원순 시장이 마지막 임기를 일부 남겨놓고 극단적 선택을 한 이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보궐선거로 다시 서울시장에 선출되었다.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서울이라는 메가시티를 토론의 장으로 계획하고자 했던 박원순 시장의 노력은 과연 앞으로의 서울에서 빛을 볼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도시문제 해결과 공공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도시계획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그 도시계획의 근간에는 베버와 하버마스라는 위대한 사회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이론을 기반으로 한 합리적종합계획과 의사소통적계획은 각각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공간을 신속하게 개조하였고,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며 서울의 시대적 도시문제 해결과 미래상 설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사회학 이론이 모든 사회적 현상을 설명할 수 없듯이, 합리적종합계획과 의사소통적계획 역시 만능은 아니다. 합리적종합계획은 빠른 목표 달성이 가능하지만, 목표보다 수단이 우선될 수 있다. 반면, 의사소통적계획은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온전히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즉, 완벽한 계획은 없다는 것이다. 2인 가정인 김 씨네도 가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있는데, 모두를 만족시키는 도시계획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공공성을 담보하는 도시계획은 늘 모두를 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 스마트도시, 글로벌화, 탄소중립 등 우리 도시가 직면해야 할 사회적 변화가 다가오고 혹은 이미 다가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변화를 이끈 근대사회의 등장을 합리성으로 해석했던 베버처럼 우리 도시는 앞으로도 합리성으로 급변하는 사회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의사소통이 합리성을 완성시킨다는 하버마스의 주장처럼 우리 도시는 정말 누구나 의견을 제시하고, 상호이해할 수 있는 토론장이 될 수 있을까? 혹은 베버와 하버마스 외에도 다른 위대한 사회학자들의 생각이 우리 도시의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도시계획을 하는 사람들은 건축과 토목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는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학을 놓지 말아야 한다. 도시의 시대에서 사회문제는 곧 도시문제이고, 사회계획은 곧 도시계획이며,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사회학자이셨던 김 씨의 도시계획학 지도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시의 미래는 도시계획에 있고, 도시계획학의 미래는 사회학에 있다. 사람을 빼면 도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30인의 위대한 사회학자의 렌즈로 도시를 바라보고자 하는 이 브런치북이 우리 도시의 현상과 미래를 고민하는 미약한 도시계획학적 시도로 남았으면 좋겠다.
베버는 독일 튀링겐주의 에르푸르트에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베버의 아버지는 유능한 관리이며 정치적으로 상당한 지위에 있었으며, 현세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반면, 베버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청교도적인 금욕 생활에 추구하였고, 현세보다 내세, 기독교 식으로 표현하자면 사후 천국에서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베버는 청년 때 아버지의 삶의 방식대로 살았다. 18세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전공하며 사교클럽에서 활동하였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며 때로 다른 사람과 결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베버는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법률가가 되어 베를린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삶의 방식보다 어머니의 삶의 방식대로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스스로 엄격하게 시간을 지키고, 저녁 식사를 한 파운드의 잘게 간 고기와 네 개의 달걀로 때우며 부지런하게 학문에 열중했다고 한다.
이렇게 금욕적으로 열심히 학문에 매달리면서 베버의 관심 영역은 점차 법학에서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으로 확장되었다. 결국 1896년에 하이델베르크의 경제학 교수가 되며 학문적 경력을 꽃피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고, 6~7년 동안 학계에서 활동하지 못하였다. 1903년이 되어서야 그의 정신능력이 회복되어 학계에 복귀하였고, 그의 어머니의 종교적 생활로부터 영감을 얻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s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을 집필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베버는 사회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저작들을 써내기 시작했는데, '경제와 사회(Economy and Society)'가 대표적이다.
1910년에 베버는 독일 사회학회 창건을 도우며 짐멜(G.Simmel), 루카치(G. Lukacs) 등 저명한 사회학자들과 교류하며 사회학 발전에 기여하였다. 학계에서뿐만 아니라 베버는 정치적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는데,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전 후 의회민주주의적인 바이마르 헌법 제정 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현대 사회학은 베버를 알지 못하면 공부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사회학계에서 베버의 위치는 어마어마하기에 마르크스, 뒤르켐과 함께 사회학의 3대장으로 불린다. 특히, 아버지의 관료적 정신과 어머니의 청교도적 정신에 영향을 받은 베버는 합리성과 종교에 대한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후대 학자들에게 근대성과 자본주의 체계를 이해하는 틀을 제공하였다. 그의 저서인 경제와 사회,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사회학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최고의 사회학 저서 1위, 4위로 꼽혔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앞으로도 우리가 사회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버마스는 현재 유럽을 대표하는 지성 중 한 명이다. 1929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하버마스는 10대 때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였다. 나치 독일의 패망과 함께 하버마스는 한 때 나치가 금지했던 책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 마르크스와 앵겔스의 저작들도 있었다.
1949년부터 하버마스는 괴팅겐, 취리히, 본에서 철학, 심리학, 독일 문학을 공부했고, 1954년 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조사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하버마스는 저명한 사회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 Adorno)의 조교가 되며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하버마스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4년에 철학, 사회학 교수로 다시 프랑크푸르트대학으로 돌아왔고, 1994년 종신교수(tenure)가 되었다.
하버마스는 그의 학문적 성취로 세계적인 학술상을 수없이 받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가장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의사소통이었다.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의 구조가 의사소통을 왜곡하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따라 자유롭교 열려있는 의사소통이 가능한 미래 사회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사소통에 대한 관심은 그가 선천적 구순열로 인한 언어장애로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의사소통에 대한 그의 관심을 대표하는 저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논문 인용 횟수가 만 단위를 넘었을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여담이지만 하버마스는 1996년에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15박 16일 동안 쉬지 않고 세미나, 토론회, 기자회견, 강연을 달렸다고 한다. 또 하버마스는 간첩의혹을 받았던 '송두율'이라는 인물의 지도교수였다. 송두율이 유신체제 반대 운동으로 간첩혐의로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직접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90이 넘은 고령의 나이임에도 2019년에 1,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철학사 책을 낼 정도로 하버마스는 여전히 학문적 성과를 내고 있는 Living Legend이다. 유럽의 지성이라는 별칭은 전혀 과한 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