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1998), 오르한 파묵

by 봄눈

터키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1998)'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가들 사이에 일어난 암투와 살인을 줄거리로 삼아 파묵은 그림뿐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의 '예술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 아름다운 소설이다. 다중 화자 기법을 써서 카라, 에니시테, 금화, 빨강, 살인자 등이 각자 자기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읽기에도 너무너무 재미있다. 다른 인물들의 심정을 아는 것, 그리고 적확히 묘사하는 것. 내가 작가들에게 가장 놀라워하는 부분이다. 작가들이란 독심술의 대가들일까?

예를 들어, 그림 속에 그려진 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개에게 본능적인 분노나 격정으로 적의 살에 이빨을 박는 것보다 더 큰 희열이란 없지요. p. 29


다음은 살인자의 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이런 생각을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파묵은 어떻게 모든 사람의 마음속을 이렇게 꿰뚫어 볼 수 있을까.


그 사소한 운명의 장난으로 나에게 벌어진 일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도덕적이거나 더 선하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다만 그들은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뿐이며, 모든 바보들이 그렇듯이 착해 보일 뿐이다. p.38

그리고는 일고여덟 걸음 앞서가고 있던 그의 뒤통수를 힘껏 돌로 내리쳤다. 얼마나 빠르고 강하게 내리쳤던지 한순간 마치 내 머리를 내리친 것처럼 온몸을 움찔했다. 그가 느낀 통증을 나 역시 느낄 수 있었다. p.47


나는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이 책의 서술방식을 정말 좋아한다. 각자의 입장들을 읽다 보면 작가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사랑하지 않고는 그렇게 세세하게 각자의 입장을 쓸 수가 없다.

또한 이 소설은 죽음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한한 이야기가 겹겹이로 나온다.

터키의 세밀화 1

이 그림을 보면 그림과 세상의 아름다움은 나의 죽음과는 무관하며, 설사 사랑하는 아내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나의 죽음은 철저히 나 혼자만의 몫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아찔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p.42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도 죽음에 관한 묘사인데, 이 부분도 죽음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전달해주어서 좋았다.


저는 그저 한 그루 나무이기보다는 어떤 의미가 되고 싶습니다. p.96

화풍은 세밀화가가 원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세밀화가의 과거가, 잊었던 기억이 비밀스러운 결점을 드러내는 거라고 가르쳐주었지. p.280(2권)

나무의 이름을 빌려서 하는 이 말은, 과거에 터키의 세밀화가 그랬듯이 독자적인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림이 스토리에 봉사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준다. 그래서 그림은 화가가 누구였는지 알 수 없게 완벽하게 그려져야 하는 것이다. 화풍이 있다는 것은 결점이 있다는 것이라고 과거의 터키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을 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그림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이야기의 일부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위한 그림이었지. p.55

그림은 이성의 침묵이며 응시의 음악이다. p.110

이런 부분은 터키의 전통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드디어 그림이 독자적인 예술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상황을 나타낸다. 그 시대에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얘기해주고 있다.

터키의 세밀화 2

화가는 오만해서는 안 돼. 동방과 서방에 대해 고심하기보다는 오직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그려야만 해. p.315(2권)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고 소설가인 작가가 소설에 대해서 하는 생각으로 읽힌다. 그림을 소설로 바꾸어 놓아도 무리가 없다. 과거의 터키 세밀화가들이 그러했듯 신이 세상을 보시는 방식대로 나타내야 하는가, 자기 자신이 보는 대로 그려야 하는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아도 오만함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모든 예술가들의 고민을 담은 듯하다.

특히, 죽음의 순간을 경험하는 화자가 자신의 죽는 순간에 대해서 생생히 이야기하는 부분은 최고이다.


베르자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고 공간의 경계도 없다. 그러나 삶이 꽉 끼는 셔츠와 같다는 것은 오직 시간과 공간의 감옥에서 벗어나야만 깨달을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왕국에서 진정한 행복은 육신이 없는 영혼이라면 산 자들의 영토에서 가장 큰 행복은 영혼 없는 육신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죽은 다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그래서 난 나의 근사한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집에서 날 위해 쓸 데 없이 울고 있는 내 딸 세큐레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면서 고매한 신을 향해 기도했다. 우리에게 천국에서는 육신 없는 영혼을, 그리고 이승에서는 영혼 없는 육신을 베풀어 주십사고. p.53(2권)


이 부분이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2권 53쪽 에니시테가 자신의 사후 경험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다. 삶이란 꽉끼는 셔츠와 같이 나의 존재를 옭아매는 것이다. 옛날 할머니의 말씀대로 훨훨 날아간다는 표현이 죽음에도 어울릴 것만 같다. 살아있는 우리는 영혼보다 육신을 사랑하며, 죽는 순간까지 행복하게 머무르고 싶다. 죽어보지도 않은 작가가 어쩌면 저렇게 그럴듯하고 자연스럽게 죽은 후의 순간을 묘사했는지, 죽음이 저럴 것이라고 믿고 싶어 지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영혼 없는 육신을 바라는 이생의 순간이다.


모든 시간이 지금 이 시간이 되었다.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겠지. 정신이 차츰 희미해졌다. 수년 동안 내 머리는 진흙 속에 묻힌 채 이 슬픈 비탈길, 돌담,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뽕나무와 밤나무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 끝나지 않을 기다림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루하게 느껴지던지, 얼른 이 시간에서 나가고 싶었다. p.322(2권)


이 부분은 살인자의 머리가 몸에서 잘려나가 아무도 없는 풀숲을 뒹굴며 하는 이야기이다. 살인자는 영겁의 시간을 '이 시간에서 나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존재하게 된다.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권선징악을 이루어내는 소설가 파묵의 영특함이란.


나는 이 책의 이야기 모두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서술 방식과 문장 하나하나를 사랑했다. 지금도 이 책을 다시 읽을 때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눈으로 쓰다듬듯이 읽는 것 같다.

터키의 세밀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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