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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ul 18. 2023

이제는 이런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알아서 지나간다.

왜 여태껏 비 오는 날에 산책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만 원 주고 산 싸구려 젤리슈즈를 신고 터덜터덜 빗속을 걸었다. 비에 젖은 축축한 흙내음이 풍긴다. 흠~ 최대한 긴 들숨으로 흙내음을 들이켰다가 아깝다는 듯이 후~ 짧은 날숨을 뱉었다.     


고요한 산책길을 만끽하던 중 어김없이 쿵짝쿵짝 요란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트로트 공격이다. 산책 중엔 반드시 트로트나 인공지능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유튜브 방송, 혹은 할렐루야나 염불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오늘의 공격을 피해 재빨리 걸었다.      


고요함을 되찾았을 때 싫다는 건 멀어지고 싶은 것과 같다는 걸 알았다. 싫으면 가까이 있기 싫다. 그는 언젠가부터 건널목 앞에 나란히 섰을 때 내게서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오늘 무슨 생각을 해도 회상모드로 빠져버리는 것은 선풍기 때문이다. 창고에 넣어두었던 선풍기를 꺼내면서 작년 여름 하루도 빠짐없이 자고 있던 나에게 선풍기를 틀어주고 출근했던 그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것에 아주 큰 감동을 받고야 마는 쉬운 여자이기 때문에 조금 우울해지고 말았다.

‘이제 선풍기는 내가 틀면 되지. 그따위가 뭐라고.’      


캣맘 기다리고 있는 중

툴툴거리며 걷다가 요란스러운 뽕짝 소리에 또 과거를 소환해 버리고 그래도 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귀엽다고 낄낄거리는, 이렇게 낄낄대기까지 1년이나 걸린 나란 사람.      


지난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혼자 살았다. 아니 혼자 살다시피 했다. 나는 그의 존재를 그가 내는 소리로만 인식하고 살았다. 이른 아침, 늦은 밤에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쾅 닫는 소리, 바닥에 질질 끌리는 슬리퍼 소리 같은 것들.     


그것들은 처음엔 혼자가 아니란 생각을 들게 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언젠가부터는 그가 내는 모든 소리가 듣기 싫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웃어버렸다. 그동안 나는 아침마다 내 볼에 키스를 해줬던 기억 속의 그 사람을 원했을 뿐이었나?

    

산책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내 앞에는 검소하지만 단정한 차림새를 한 노인이 서 있다. 꼿꼿한 자세에서 자신감이 흘러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는 나를 돌아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고는 오른손으로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먼저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바로 그였다. 사실 우리는 서로의 배설 소리를 듣고 있는 매우 가깝고도 매우 먼 사이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씻는 소리와 늦은 밤 오줌 싸는 소리로 아래층 사람들을 상상했던 터라 tv속 인물을 만났듯 신기했다.       


그는 이렇게 다정하고 단정한 사람이었구나. 과연 자신의 아내에게도 엘리베이터를 먼저 타라고 다정하게 오른손을 뻗어 보일까? 그 찰나의 순간에도 내가 한때 누렸고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을 헤아려 본다. 그러니까 오늘은 아주 작정한 그런 날인 거다.     


이럴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내가 싫었다. 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부정하느라 매번 탈진할 정도로 온 정신을 쏟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벗어나지 못하고 휩쓸려 잠식당할 뿐이었다.   

   

1년이 되었지만, 오늘의 나는 또 당연하다는 듯이 과거를 소환하고 허상인 줄 알면서 또 헷갈려하고 또 그렇게 어이없다는 것을 깨닫고 웃었다. 나는 여전하다. 달라진 것은 그런 나를 부정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다는 것 하나뿐이다. 더 이상 내 감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가치를 매기지 않는다. 그러면 알아서 지나간다. 이제는 이런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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