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비 Jul 24. 2023

유령부부 1년 차

일 년이 지나 다시 여름

벌써 일 년이 지나 다시 여름이 되었다. 한집에 살면서 각자의 공간에서 어떤 교류도 없이 각자 생활하는 부부를 유령부부라고 하더라. 그렇다면 우리는 유령부부 1년 차에 접어들었다.      


이렇게 살 수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지난 2019년, 고작 3주 동안의 유령부부 생활로 나는 수면제를 먹었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아야 했고 암 환자용 식욕 증진제를 처방받았었다. 온전한 정신과 건강한 몸으로 생활하는 건 불가능했고 이대로 살다 간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었다.   

   

2023년 지금의 나는 잘 먹고 잘 자고 있다. 이것을 다행이라 할지 불행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집은 방 4개, 화장실 2개가 있는 비교적 넓은 집이라 우리(우리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는 한 달 정도는 가뿐하게 얼굴을 마주치지 않고 생활할 수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혼을 논하고 있었지만, 같이 산책도 했고 밥도 먹고 술을 마시기도 했으며 때로는 tv를 보고 함께 낄낄거리기도 했다.  

    

그가 이혼을 원할 땐 내가 원하지 않았고 내가 이혼을 원할 땐 그가 원하지 않았다. 둘 다 이혼을 원했을 땐 이혼 조건이 합의되지 않았고 합의를 위한 대화는 진척이 없었다. 우리는 각자에게 맞는 최선의 이혼을 위해 한 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았고 숨 막히는 대화의 끝엔 끝을 알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언제나 그 침묵의 기간을 참지 못하고 먼저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은 나였지만 올해부터 나 또한 대화하기를 포기하였다. 이제 이 침묵의 시간이 익숙해졌고 편안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혼자 사는 것은 둘이었을 때와 거의 모든 것이 같았고 동시에 거의 모든 것이 달랐다. 그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나고 외식이나 배달음식을 시키는 일 없이 내 손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언제나 집안을 깨끗한 상태로 유지했다. 매 순간 하고 싶은 일들로 하루를 보내고 저녁엔 긴 산책을 하고 샤워 후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것이 평생토록 원했던 삶이었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달라진 것은 이 모든 순간에 그가 없다는 사실 하나다.      


이 평안함이 순식간이 무너지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시작되곤 했다. 베란다 천장에 설치된 건조대가 망가져서 고치려 애썼지만, 근력 없는 내 두 팔로는 도저히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을 때. 나는 대부분 그런 일로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는 현실을 직면했을 때 어떤 것들을 그에게 의지했는지 알게 되었고 동시에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도 알게 되었다. 충분히 혼자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 사실은 혼자 사는 삶을 그저 흉내 내고 있을 뿐이라는 낭패감도 느꼈다. 실제로 혼자가 되었을 땐 이 자신감이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당연한 믿음이 있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그동안 단지 운이 좋았던 인생을 살았던 것뿐이었다. 아무리 아등바등 애쓰고 노력해도 인생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를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 1년 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렇게 힘들었던 것 같다. 나의 현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서 괴로웠고, 통제되지 않아서 힘들었다. 하지만 나의 결혼은 파탄 났고 지난 20년간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들, 죽을 때까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상태는 아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인생이 흘러가는 방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예전과 달리 적어도 잘 먹고 잘 잘 수 있게 된 것은 아마도 그래서 일 것이다. 반드시 이혼하지 말아야 하고 반드시 이혼해야 된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것일 뿐.      

1년이 지난 지금도 내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이 고백에 용기가 필요했음을 밝힌다. 여전히 종착지는 알 수 없고 이제 그런 것은 정해두지 않는다. 내가 정해놓은 것이 날 너무 힘들게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실은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 16화 이제는 이런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