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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an 18. 2024

 엄마는 나에게 장어를 먹였다.

장어구이

우리 집의 공식적인 외식은 어버이날과 부모님의 생신 이렇게 일 년에 세 번쯤 된다. 나의 결혼을 기점으로 별일 없어도 외식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가 다시 예전의 페이스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부모님의 마음속에는 딸보다 더 살가웠던 그와 천하의 개새끼인 그가 함께 존재한다. 그들은 그의 전화번호를 차단한 것처럼 그를 완벽히 지워버리진 못했다.    

 

엄마는 외향적이라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면서도 정작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다. 그녀가 마음을 내준 사람은 오로지 가족뿐이며 그는 나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안에 포함되었다. 반면 아빠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서툴지만, 자신과 잘 맞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홀딱 내주었고 대신에 하루아침에 마음을 끊어내기도 잘했다.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못하지만 한번 마음을 주면 홀딱 빠져버리는 나의 기질은 아마도 나의 부모에게서 온 것이 아닐까. 내가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면서도 하루아침에 끊어내기도 잘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작년 어버이날과 아빠의 생신에는 외식하지 않았다. 나가기 귀찮다는 핑계를 댔지만 우리는 외식이 그의 부재를 상기시킬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나의 부모가 바라왔던 자식 된 도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딸보다 더 자주 전화통화를 하고 수시로 먹을거리를 사 들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쩌면 그에게도 나의 부모가 오랫동안 바라왔던 부모상이 아니었을까.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좋고, 별로 잘나지 않은 자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뭐든지 자식이 일 순위인. 사람들은 부모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 여기지만 이 세상에 그런 부모는 흔치 않다.      


그는 내가 그런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걸 부러워했었다. 그러나 이제 아빠는 물론이고 엄마조차도 그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무래도 여복이 있다던 그는 부모 복은 없고 남자 복은 없다던 나는 부모 복은 타고난 모양이다.      


그러나 엄마의 생신에 엄마가 생신상을 차릴 수는 없는 법. 우리는 장어를 먹으러 갔다. 이제 내가 부모님을 차에 태우고 운전을 한다. 화가 많고 수시로 짜증을 내는 아빠가 유일하게 다정해지는 순간은 내 옆에서 길을 안내하는 순간일 것이다. 나는 차라리 아빠가 운전하는 내 옆에서 벌컥 화를 내지만 평소 대부분의 순간에 다정한 사람이었다면 내 인생이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부모 복이 있는 자식도 틈만 나면 부모 탓을 한다.      


부모님은 20년이 넘었다는 그들의 단골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식당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언니와 나는 그곳을 처음 가보았다. 왜 부모님의 20년 된 단골집을 이제야 가게 되었을까. 우리 자매가 그들에게도 결코 쉬운 자식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비가 몰아치는 바다를 옆에 두고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다른 사람들과 올 땐 집게를 들지 않는다던 아빠가 집게를 들고 장어 한 조각 한 조각을 정성스레 구웠다. 그는 물 한잔도 직접 떠다 줘야 마시는 가부장적인 남자로 최근 몇 년까지도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있던 사람이었다.  

    

운전을 맡은 나를 빼고 셋이서 소주를 마셨다. 엄마가 자꾸 무언가를 흘리는 것을 보니 술이 꽤 취한 모양이다. 생각보다 빨리 취하는 것을 보며 부모님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엄마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려는 듯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이제부터, 우리끼리 맛있는 걸 많이 먹으러 다니자고 한다. 그 말이 애써 떨쳐냈던 남편의 존재를 다시금 상기시킨다는 걸 엄마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엄마는 늙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외식을 많이 하지 않으리라 걸 알면서도 나는 그러자고 말했다.     

 

그 일대 20년 넘게 자리 잡은 가게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모두 사유지에서 불법으로 운영되는 가게들이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데려간 장어집은 곧 아파트가 들어서서 철거될 예정이고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의 단골집에서 다 함께 장어를 먹었다.      


집이 코 앞이었지만 우리는 산을 빙빙 돌아 내려오는 드라이브 코스를 향해 출발했다. 이곳에서 18년 전에 땀을 줄줄 흘리며 운전 연수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운전을 질색하는 나는 평소대로라면 이 어두컴컴하고 꼬불거리는 산길 운전을 거부했을 테지만 엄마의 생신이지 않은가. 나는 어느새 이렇게 가족들을 태우고 드라이브를 즐기려 애쓰는 어른이 되었네.    


너무 좋다던 엄마가 갑자기 잠잠하다. 백미러로 엄마를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애쓰지 않고도 웃으며 엄마에게 왜 우냐고 물어볼 수 있었다. ’누가 보면 엄마가 이혼하는 줄 알겠어’라는 농담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던 슬픔은 가시고 이제는 웃으며 그럭저럭 함께 살아갈 만한 여운만이 남았다. 아무래도 자식을 둔 엄마의 마음은 나와는 다른 것이겠지. 만약, 내가 슬픔에 잠겨있는 상태였다면 엄마의 생신임에도 불구하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화가 났던 순간은 슬프고 외롭고 힘들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엄마에게 잘 지낸다고 말할 때였다. 그때마다 엄마는 귀신같이 내가 잘 못 지내는 걸 알아챘었다. 그럼 나는 왜 내 말을 못 믿냐고 화를 냈었지. 누구보다 엄마에게 들키기 싫었는데 모른 척 넘어가 주지 않은 엄마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만만한 그녀에게.     


아마도 언젠가는 우리 가족의 마음속에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칼에 그를 쳐낸 아빠와 언니를 제외한- 남겨진 그를 편안하게 마주할 날도 오겠지. 엄마는 그렇게 힘을 내보자고 내게 장어를 먹인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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