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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Feb 01. 2024

아직 맛보지 못한 음식은 많다.

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P의 집에서 먹었던 피자가 떠올랐다. 그것은 싫어했던 회사 선배 L이 어릴 때부터 즐겨 먹었다던 가게의 피자였다. 그때 나는 L과의 식사가 불편해서인지 피자에게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년 만에 다시 맛본 피자는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맛있어져 있었다.     


걷다 말고 길 한가운데 서서 그 피자를 사러 갈지 말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는 배달되지 않는 곳에 있다. 평일에도 웨이팅해야 하는 곳을 주말에 간다는 건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포장만 하는 지점이 생겨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운전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주말의 붐비는 시내를 운전하기는 죽기보다 싫다.(전투기를 모는 비행사보다 러시아워에 운전하는 사람의 긴장도가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의 운전 공포증을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 환호성을 지른 적이 있다.) 그러나 피자는 먹고 싶다. 지하철을 타기로 한다. 냄새가 진동하는 피자를 들고서 환승까지 해야 하는 험난한 길을 기어이 떠나기로 한다. 대단한 식탐이다.      


이재모 피자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화국반점이 있다. 좋아하는 맛집은 대부분 남편과 함께 간 곳이다. 20년의 세월은 어딜 가도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게 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없는 노릇. 그랬다간 20년 동안 즐겼던 맛있는 음식을 죄다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화국반점을 거쳐 이재모 피자로 향하는 길에 개보수가 끝난 부산 근현대 역사관에 잠시 들러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재즈 선율이 온몸을 관통하듯 광광 울려 퍼진다. 어느새 피자는 까맣게 잊고 홀린 것처럼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가 그들의 연주를 감상했다. 나는 연주가 끝날 때마다 손바닥으로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마찰음을 냈다.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며 앙코르를 외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부끄러워서 못했다. 물론 휘파람도 불 줄 모른다.      


드디어 이재모 피자로 갔다. 키오스크는 은근히 사람을 긴장시키지만 언제나 여기서 피자를 포장해 가는 사람인 듯 능숙하게 주문을 완료했다. 뿌듯한 마음과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직원에게서 피자 한 판을 받아 들고 사람들로 붐비는 그곳을 신속히 빠져나왔다.       


피자가 담긴 비닐백의 입구를 꽉 틀어지고 지하철을 탔다. 그럼에도 흘러나오는 냄새를 막을 길은 없었지만 태연한 척 자리에 앉아 냄새가 진동하는 뜨거운 피자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사람들이 내 피자를 힐끔거리는 것만 같다. 네네. 저는 오늘 피자랑 소맥을 할 예정입니다.      


나는 종종 음식으로 장소를 기억한다. 중앙시장을 지날 칠 땐 어릴 때 엄마와 기다랗고 낮은 나무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할머니가 숭덩숭덩 썰어준 순대를 먹었던 기억이 떠오르고 강남 일대를 생각하면 자동적으로 안동국시나, 명인등심, 새벽집이 떠오른다. 서울 출장을 갔을 때의 점심, 저녁, 아침 해장 코스였기 때문이다.      


남포동은 아빠의 직장이 있던 곳이었다. 코찔찔이였을 때부터 들락거렸던 할매회국수, M과 먹었던 돌고래순두부, 소개팅남과 함께 온면을 먹었던 원산면옥이 (그는 길에서 나눠 준 ‘미샤’ 전단지를 받아 들고 당당히 ‘미카’라고 읽었었지.) 모두 그곳에 있다.     

서울깍두기, 고갈비, 주꾸미, 메밀국수, 거인통닭, 냉채 족발, 충무김밥, 길거리 튀김과 팥빙수와 팥죽, 비엔씨 샐러드빵, 등등 유난히 남포동 일대에서 뭘 많이 먹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와 이 많은 음식을 함께 먹었는지 짐작될 것이다.     


요즘 나는 남포동을 떠올리면 ‘이재모 피자’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포장해 온 온 피자는 물론 맛있었지만, P의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먹었던 것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그제야 피자를 들고 우리 집에 가서 엄마, 아빠와 함께 먹었어야 했다는 걸 알았다. 역시, 뼛속까지 이기적인 년이구나 나는.    

  

다음엔 반드시 그들과 함께 먹으리라. 그렇게 새로운 추억 하나를 만들고 또 만들어야지. 내가 그와 함께했던 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거기엔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음식들이 무궁무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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