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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an 11. 2024

튀긴 건 사랑이 아니라 치유

돈가스

정류장에 있는 학생, 주부, 직장인, 자영업자, 백수 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을 것 같은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여자의 목적지가 돈가스 맛집이라는 사실 역시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겠지. 여자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평일 오후 2시. 12시에서 1시 사이가 일반적인 점심시간인걸 감안하면 다소 늦은 시간이다. 물론 나는 치밀한 계획하에 이 시각에 맞춰 집을 나섰다. 이때가 혼밥을 하는 이들이 식당을 찾아가기에는 적당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소 집에만 있던 여자는 이 시각에도 버스 안이 사람들로 붐빌 줄은 예상치 못했다. 버스 손잡이를 붙들고 서서 언덕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는 버스에서 균형을 잡으려니 땀이 삐질삐질 흐른다. 제길, 돈가스 하나 먹자고 이게 무슨 개고생인가.     


이런 고생을 마다 앉고 찾아가는 맛집은 단돈 6,000 천 원에 경양식 돈가스를 판다. 나는 두툼하고 바삭한 일본식 돈가스보다 소스가 촉촉하게 듬뿍 스며든 얄팍한 경양식 돈가스가 좋다. 어쩌나 이 나라가 경양식 돈가스를 찾아 헤매야 할 지경이 됐는지는 모르겠다만, 찾아서 먹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싶기도 하다.      


버스에서 내리고서도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돈가스집은 언덕배기의 한가진 주택가 사이에 있었다. 후미진 곳에 있는 오래된 돈가스 맛집은 발길을 돌리게 만드는 외관이었지만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생각보다 깨끗한 내부에 맘이 놓인다. 혼밥 하는 사람들이 주로 앉는 바 형태의 테이블에 자리 잡고서 돈가스, 쫄면, 김밥, 후식으로 송편 1개가 구성된 돈가스 세트를 주문했다.      


뒤이어 한 남자가 한 자리 건너 옆자리에 앉아서 돈가스를 주문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나는 식당에서 혼밥을 할 때면 핸드폰을 보지 않게 된다. 그냥 멍하니 앉아서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음식이 나올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밥만 먹는다. 사실은 근처 사람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 게 더 재밌다.     

돈가스가 나왔다. 나는 몹시 배가 고프고, 흥분되어서 돈가스를 써는 동안에 살짝 손이 떨렸다. 마침내 돈가스를 먹기 좋은 크기로 다 잘라서 입안에 집어넣었다. 우와 겁나 맛있다. 과일의 상큼한 단맛이 느껴져 소스를 유심히 살펴보니 갈린 과일 입자들이 보인다. 이 집은 돈가스 맛집이 맞았다. 돈가스 한 조각이 없어질 때마다 아쉬움이 느끼며 한 조각 먹을 때마다 정성 들여 돈가스 맛을 음미한다. 남자는 이미 다 먹고 식당을 나간 상태다.      


근처 손님이 모두 사라져서 아쉬워하고 있는 차에 홀 서빙을 맡은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대화가 뭔지 유추할 수 없는 단답형 대답 만이 홀에 울려 퍼진다. 전화가 끝나고 나서 여자는 크게 한숨지었다. ‘진짜 이 새끼는 하루라고 사고 안 치고 넘어가는 날이 없네’ 혼자 중얼거린 것치곤 꽤 크게 말했으므로 주방에 있던 사장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여자가 말했다. ‘이 새끼가 또 사람을 팼나 봐요.’    

 

평소에는 돈가스 1인분을 다 못 먹지만 후식으로 나온 송편까지 모조리 다 먹어치웠다. 현금으로 6,000원을 내고 돈가스집을 나왔다.      


주문받을 때 그토록 상냥했던 그녀가 돈가스 옆 건물 계단에 두 다리를 양껏 벌리고 쪼그리고 앉아 입과 코로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다. 동일인물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진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온다. 모름지기 인생이 이런 것이더라고요. 어쩌겠습니까. 언니. 나는 그녀와 같이 길고 깊은숨을 뱉으며 비탈길을 내려가 다시 붐비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참 이상하지. 돈가스를 좋아하지 않는데 남편과 이렇게 된 이후엔 입맛이 없는 와중에도 돈가스가 생각났다. 나는 조금이라도 입맛이 살아나 돈가스가 먹고 싶어지면 돈가스 맛집을 검색하고 돈가스를 먹으러 뛰쳐나갔다.      


마치 돈가스가 치유의 효과가 있는 음식인 것처럼. 혼자서 국밥을 먹을 땐 그렇게 외롭더니 돈가스는 혼자 먹어도 다음의 돈가스를 생각할 의지가 생겼다. 나이가 들면 녹찻물에 만 밥에 쿰쿰한 보리굴비 얹어 먹는 맛을 좋아하게 될 줄 알았는데 돈가스를 좋아하게 된 중년이 되었다. 그래, 모름지기 인생은 이런 것이지. 그래서 뭐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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