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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Jan 25. 2024

나를 사랑하는 손쉬운 방법

숙주볶음

 

숙주 한 봉지를 식초 물에 담가 놓는다. 잠시 후 숙주를 건져내고 흐르는 물에 씻어낸 후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살짝만 두르고 숙주를 쏟아붓는다. 그리고 페퍼론치노, 굴 소스 한 숟가락 투하. 숙주에서 국물이 자박자박 나오면 요리는 끝이다.   

   

소고기도 넣어봤지만, 숙주만 넣어서 깔끔하게 볶아 먹는 게 더 입에 맞았다. 어쨌든 포인트는 페퍼론치노다. 청양고추는 익히면 매운맛이 누그러지지만 페퍼론치노는 끝까지 매콤함을 잃지 않는다.     


나의 요리 실력은 썩 훌륭하다고 볼 순 없지만, 나쁘지만도 않다. 어릴 때부터 먹고 싶은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어서 웬만한 식재료 정보와 취급방법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미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하지만 성질머리가 급해서 오래 걸리는 요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퇴근 후에 집에 도착하면 보통 저녁 8~9시 정도였다. 나는 가끔 편의점 음식이나, 보통은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대충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 걸었다. 온종일 일을 했지만 산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나마 내 사정은 나았다. 워킹맘이었던 J는 퇴근 시간이면 믹스커피 2 봉지를 원 샷 하고 이제 집으로 일하러 간다고 한숨짓곤 했으니까.     


퇴사 후에 본격적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요리는 확실히 품이 든 만큼의 성과를 냈는데 아무리 간단한 음식도 귀찮다고 생각하면 귀신같이 맛없게 만들어졌다. 물론 정성을 들인 음식도 맛이 없을 수는 있지만 어떻게든 정성을 들인 티가 난다. 썰어 넣은 채소의 단면만 봐도 알 것이다. 그런 음식에는 말라비틀어진 당근의 쪼그라든 단면같이 오랫동안 냉장고에 묵혀두었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먹는 사람의 평가를 받기 마련이라 약간의 떨림과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이 맛있게 먹어주는 것으로 그 감정들은 말끔히 해소되고 다시 요리할 동력이 생긴다. 그 맛에 요리하는 것이다. 심지어 음식 만드는 수고를 알아주기까지 한다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이해받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음식을 만들어주면 그렇게 고맙다. 그 수고를 알기 때문이다. 맛집이라고 데려간 곳의 음식이 별로라도 맛있다고 말해준다. 미각이 예민해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거짓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중요한 건 맛의 평가가 아니라 맛있는 걸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므로 신랄한 평가는 혼자서 하면 된다. 나는 먹는 일에 관해서만은 한없이 관대하다.      


내 숨통을 트이게 하는 건 걷기와 쓰기였지만 자신을 귀히 여기겠다는 다짐을 실행케 했던 건 요리였다. 삶의 의욕과 함께 식욕도 사라졌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며 혼자서도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남을 위한 요리가 아닌 오로지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요리가 페퍼론치노를 무진장 때려 넣은 숙주볶음이다. 들기름을 잔뜩 뿌린 간장비빔국수, 씻은 묵은지와 두꺼운 계란말이만 들어간 김밥, 아삭거리는 연근을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똠얌꿍.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그것만으로도 끼니가 해결되는 간단한 요리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여전히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마다 어색함과 거북스러움이 끝맺음처럼 뒤따라 오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 사랑은 언제나 어렵고 요리는 언제나 쉬웠다. 그래서 요리는 나를 사랑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되어 주었다.     


손수 요리를 해서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 버거운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삼각김밥 대신에 따끈한 밥에 매콤한 숙주볶음을 올려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이 낼 수 있는 손맛으로 자신을 대접하는 기분을 느끼면서 하루를 마감하는 일은 그래도 내가 꽤 잘 살아가고 있다는 만족감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용기를 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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