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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6화

 근처 부동산으로 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번도 염두해 본 적은 없지만, 불현듯 떠오른 동네의 부동산으로 전화를 걸었고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낯선 동네에 들어찬 낮고 허름한 건물들을 보자마자 다시 익숙한 동네로 가고 싶은 욕구가 명치 아래로부터 치솟았으나 꾹꾹 억눌렀다. 

 낮은 빌라와 추레한 주택이 촘촘하게 꽉 들어찬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고 저 멀리 산자락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보였다. 피할 겨를도 없이 지워버리고 싶은 한 장면이 머리를 후려쳤다. 야반도주하려던 것처럼 살림살이를 헤집어 놓은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고 여기저기에 옷가지들이 퇴비처럼 쌓여있었다. 중개인은 상주하고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집이 엉망이라는 구시렁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오랫동안 일본에 거주하다가 몇 달 전에 들어왔다는 사람의 집도 보았다. 유물처럼 보이는 침대 옆 서랍장 위에 흑백사진이 놓여있다. 명백한 결혼사진이었지만 사진 속 신부는 굿판에 뛰어들기 직전의 무당 같아 보였다.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바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간 것을 후회할 만큼 온통 흙투성이였고 말라비틀어진 대파가 흙 뿌리를 단 채로 거실에 나뒹굴고 있었다. 중개인은 구시렁대지 않았다. 집주인은 몇 달 전에 죽은 채로 이곳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와 거실에서 장난감 놀이를 하던 젊은 여자가 있었고 인터폰을 교체한 것이 그 집의 최대 장점인 것처럼 뜬금없이 그 사실을 말해주는 늙은 여자가 있었고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리모델링된 집에서 아이를 위해 김밥을 만들고 있던 젊지도 늙지도 않은 여자가 있었다. 평일 오후에 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여러 집을 둘러보고 나서 어떤 집을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지금의 집처럼 거실 창밖으로 바다의 전경이 펼쳐지는 곳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온종일 햇빛이 잘 드는 집이었으면 했다. 깨끗하게 리모델링된 집이라도 거부감이 들었던 건 해가 집 깊숙하게 들어오지 않아서였다. 누수의 흔적과 새시의 교체 여부, 화장실, 싱크대, 베란다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 집보다 마음에 드는 곳은 당연하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등근육이 팽팽하게 당겼다. 집에 가서 드러누워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다 때려치워야겠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 때 그 집이 나타났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노인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가장자리가 물결치는 작은 어항 속에서 구피 열댓 마리가 햇빛을 받으며 헤엄치고 있었다. 낡고 간결한 살림살이에 스며든 외로움이 곧 나의 외로움이 되리란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웃기면서도 아릿했고 수줍게 웃는 할머니를 보면서 재빨리 그 마음을 털어냈다. 중개인이 살갑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어머나, 물고기들이 너무 귀엽다. 근데, 원래 이렇게 배가 볼록해요?

-배에 새끼가 들어차서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물고기가 많은 거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재들은 자기가 낳은 새끼를 잡아먹어요.       


 체육공원에서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금 집에서는 대형 교회의 붉은 십자가와 야트막한 동산 중턱에 좌불상이 보이는데 이곳의 산 중턱에는 숨겨진 것 같은 수녀원이 보인다. 수녀원이라니. 혼탁한 수로를 끼고도는 산책로가 공원을 감쌌고 공원 너머로는 빽빽하고 피로한 주택 전경이 펼쳐졌다.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눈앞에 펼쳐진 뜻밖의 전경에 몸이 굳었다. 

 그곳에는 지난 20년 동안의 내가 있었다. 매일 걸었던 공원과 해안가 산책로,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뿌듯해했던 푸른 바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교와 빌딩 숲. 지난 20년간 보고 걷고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설렜고 절망했던 그 모든 장소가. 

 J를, 그 집을, 그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지만, 그들은 악착같이 나를 따라왔다. 나 역시 어디를 가더라도 J와 그 집과 그 동네를 떠올릴 만한 것을 악착같이 찾아낼 것이다. 햇빛이 온종일 들이치는 남서향의 집, 바라던 대로 베란다가 확장되어 있고 새시가 교체되어 리모델링 비용을 그나마 아낄 수 있는, 낡고 오래된 소박한 할머니가 살았던 집. 그 집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음날 계약금을 송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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