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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까졌다.

8화

 한 달의 숙려 기간이 끝난 5월의 마지막 목요일. 법원을 갔다. 결혼생활 동안 이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판사 앞에서 이혼 의사를 확인받는 그 순간에 내 입에서 ‘네’라는 대답이 나올 때 나의 기분이 어떠할지를. 

 또 길을 헤맸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 길을 헤매다 마주친 굳은 표정의 남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뒤쪽에서 누군가가 숨 가쁘게 계단을 오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짜증을 주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고 여자는 미안해 보이려 했지만,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바글댄다. 길게 이어진 대기 줄의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나를 알아본 J가 내게 걸어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란히 섰다. 16이라는 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받아 들고 빈 좌석을 찾아 앉았다. 오른쪽으로 시선이 머무른다. J는 전에 보지 못한 자카드 소재의 바지를 입고 있다. 이번에도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기장의 타이트한 바지다. 그것을 보지 않으려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무릎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른쪽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맛집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여자는 웃을 때 손뼉을 치고 상대방의 어깨를 미는 버릇이 있다. 남자는 여자의 웃음에 밀리는 게 익숙해 보이기도 하고 어색해 보이기도 했다. 그들 옆에는 불이 불거져 나온 깡마른 남자와 얼굴이 기미로 시커멓게 뒤덮인 여자가 검은 눈동자를 하고 빈 공간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번호표를 부여받은 사람들 모두 대기실로 입장하라는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모두가 분주하게 대기실로 걸어 들어갔다. 불편함을 참을 수 없어 J와 멀찍이 떨어진 좌석을 골라 앉았다. 좌석이 모자라서 대기실의 3면에 사람들이 빙 둘러섰다.    

 대기실을 꽉 채운 사람들 모두 핸드폰을 보지 않고 빈 허공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져서 좀 웃었다. 판사 앞에 가기 전에 주의사항을 들었다. 이곳에서 확인서를 받은 뒤에 구청에 신고할 때도 부부가 함께 가야 하며 상대방의 도장을 훔치거나 위조 시엔 처벌을 받으니 그런 짓은 시도하지 말라고. 그래서 또 조금 웃었다. 훔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생각보다 확인 과정이 빨리 끝나니 놀라지 말라는 말에도. 다들 너무 빨리 끝나서 당황했구나 싶어서.    번호가 하나씩 불린다. 갑자기 심장이 콩닥거린다. 차례를 기다리는 일은 뭐가 되었든 간에 떨린다. 16번이 불렸다. 판사 앞에 빈 의자 2개가 있다. 서류 더미 옆에 앉아 있는, 살면서 처음 마주한 판사는 동네 슈퍼에서 막걸리를 사가는 할아버지 같이 생겼다. 온화한 미소로 나와 그에게 이혼 의사가 확실한 것인지를 물어본다. 수십 번 상상했던 그 장면이다.      

 나는 판사의 눈을 응시하며 ‘네’라고 대답한다. 제출했던 신분증과 확인서를 받아 들고 나왔다. 확인서에는 ‘위 당사자는 진의에 따라 서로 이혼하기로 합의하였음을 확인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대기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곳을 곧장 벗어나고 싶지 않아 화장실 앞에 있는 의자에 잠시 앉아있었다. J가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화장실로 들어가 흐르는 물에 축축한 손바닥을 꼼꼼히 씻어냈다. 

 이번에는 밀면 맛집을 찾아갔다. 또 길을 헤맸다. 그곳은 전에 갔던 서울 왕돈가스와는 분명 다른 곳에 있는데도 한번 갔던 그 길로 계속 가려고 해서 법원 주위를 뱅뱅 돌게 되었다. 다시 도착한 법원 앞에서 맛집에 온 것처럼 떠들어대던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택시를 타고 있었다. 남자가 탄 택시가 시선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전화를 걸 곳이 없었다. 샌들을 신고 있는 발에 땀이 나서 자꾸만 미끄러졌다.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까졌다. 지갑 안에 밴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꺼내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했지만, 밀면이 먹고 싶지 않았다. 땀을 많이 흘려서인지 홀을 담당하는 친절한 남자의 다리털 때문인지 기다리는 동안에 쉴 새 없이 상사 욕을 해대는 남자 때문인지 애초에 밀면을 먹고 싶지 않았던 건지 헷갈렸다. 다리에 털이 많은 남자가 밀면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밀면은 단맛, 신맛, 매운맛, 짠맛의 밸런스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맛이 없다고 느껴졌고 장조림같이 조려진 고기 고명의 맛으로 견뎠다. 밀면은 다 먹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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