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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법원을 갔고, 돈가스를 먹었다.

7화

 반바지를 입기엔  이르다고 생각되지만, 부슬비가 내려서 무릎 위로 올라오는 타이트한 블랙진을 입고 화이트 반팔 티셔츠 위로 도톰한 블랙 후드 티를 걸쳤다. 블랙 양말, 블랙 운동화를 신고 직접 만든 블랙 에코백을 어깨에 들쳐 매고 집을 나섰다. 당연하다는 듯이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탔고 10번 출구가 어딘지 몰라 조금 헤맸다. 온통 블랙으로 휘감은 채 미로같이 복잡한 건물 틈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동안 어리둥절 길 위에 서 있었다. 마침내 웅장한 법원 건물 앞에 다다르자 반바지를 입은 것이 신경 쓰였다. 

 요즘은 이혼도 오픈런한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서류접수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관공서 특유의 분위기는 사람을 주뼛거리게 했고 출입구 앞에 갇힌 직원의 도움을 받아 서류를 작성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이 남았다.  의자에 앉아 J를 기다렸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예닐곱도 안돼 보였다. 늙으나 젊으나 한결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을까. 거울을 꺼내 들어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았다. 협의이혼 접수를 하러 왔다기보다는 통장 개설을 하러 온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이다. 

 11시 7분에 J가 도착했다. 정면으로 마주한 얼굴은 흙빛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유독 시꺼멓게 변했던 까무잡잡한 J의 얼굴을 보면서 왜 화난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의아했다. 이혼을 승낙했을 때 환호성을 내지르며 낄낄거리고 웃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거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벌러덩 누워 흐뭇하게 창밖 풍경만 바라보던 그 사람 말이다. 

 J에게 미리 작성해 둔 서류를 건넸고 대기표를 뽑았다. J가 서류 작성을 마침과 동시에 접수처의 알림이 울렸다. 주민등록등본과 각자의 가족관계증명서, 혼인관계증명서를 함께 제출하고 신분증을 확인받았다. 내 얼굴과 신분증의 사진을 번갈아 보는 직원의 눈빛에서 의아스러움이 스며 나왔다. 주소지가 변경되면 신분증 사진을 다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 뒤에 다시 방문하라는 종이 쪼가리를 받아 들고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들어올 때 헤맸던 것과는 달리 출구가 곧장 찾아진다. 지도 앱을 열어 서울왕돈가스를 찾아보았다. 돈가스를 먹으러 갈 참이다. 협의이혼 의사확인 신청서를 접수하고 근처 돈가스 맛집을 향하는 나. 돈가스를 생각하며 군침을 흘리는 나.

 하루 한 끼를 고행하듯 챙겨 먹으면서도 뜬금없이 좋아하지도 않던 돈가스가 먹고 싶어졌다. 그때마다 돈가스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다시 돈가스가 먹고 싶어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서울왕돈가스는 헤매지 않고 단번에 찾았다. 가게는 특색이라고는 없는 그렇고 그런 동네의 분식집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 특색 없는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스레 닦이고 닦인 흔적들이 보였다. 오픈 주방에서 여자 3명이 음식을 조리했고 여자 2명이 홀을 담당했다. 5명의 여자들은 식당과 마찬가지로 반드럽게 숙련된 인상이었다. 

 인스턴트 크림수프가 나왔다. 이 느끼한 수프를 먹지 못해서 언제나 아빠가 내 몫의 수프까지 먹었었다. 그땐 수프를 잘 먹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생각했었다. 수프에 후추를 잔뜩 뿌렸다. 여전히 수프에 후추를 뿌리지 않으면 속이 느글거려서 다 먹질 못한다. 빈 수프 그릇을 테이블 구석으로 슬며시 밀어놓자 늙은 여자가 재빠르게 그릇을 치웠고 곧이어 종지에 담겨있는 작은 깍두기와 케첩과 마요네즈가 뿌려진 채 친 양배추, 통조림 옥수수, 마카로니, 오이 피클, 흰쌀밥이 곁들여진 돈가스가 나왔다. 이 집의 돼지고기는 경양식 돈가스치곤 꽤 두꺼웠고 소스는 돈가스 아랫면까지 촉촉하게 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접시에 묻은 소스를 돈가스로 닦아가며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먹어치웠다. 거울을 꺼내 입가를 살폈다. 양 볼이 발그스름하고 광대가 반짝였다.     

 밖을 나왔다. 쏟아지던 비는 멈추었고 가게 앞에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운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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