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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비 Oct 24. 2024

피스타치오 까먹는 소리

10화

 잠에서 깼을 때 꿈속에서의 집이 빨간 벽돌집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이곳으로 옮겨온 뒤론 그 집이 나타나지 않는다. J와 그의 가족으로부터 도망가려고 캐리어에 옷가지를 마구잡이로 쑤셔 넣는데도 아직 넣어야 할 짐이 많아 조급하고 안달이 난 맘으로 잠에서 깼다. 

 빨간 벽돌집과 J의 중간지점에 서 있다. 남서쪽에는 그 시절 다녔던 고등학교가 보이고 북동쪽으로는 J와 살았던 동네가 보인다. 이곳에 온 지 두 달이 지난 지금은 북동과 남서를 그런 식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닳아서 옅어지고 사라지는 게 있다는 걸 알았다. 그동안 바라보는 정도의 노력을 했고 애쓰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으로 마을버스를 타 보았다. 마을버스는 하나의 소도시 같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 내를 이리저리 돌았다. 내 기준에선 번잡하고 요란하고 우울해지는, 일반적인 기준에선 편의시설이 잘 잘 갖추어진 단지를 지나 한적한 내 집 앞에 들어섰을 때 편안함과 동시에 소외감을 느꼈다. 우연히 꼭 맞는 자리를 찾아 들어가게 된 거라고 여겼지만 본능적 감각이 이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게 꼭 맞는 자리는 언제나 소외감이 뒤따른다. 왜 이곳에 이렇게 덩그러니 놓이게 된 건지, 아직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원하고, 원하지 않는다. 그러고서 모든 것이 명확해지기를 바라며 괴로워한다. 이곳이 정착지가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이번의 두려움일까. 아니면 이곳이 정착지가 될 것만 같아서 두려운 걸까. 하지만 괴로운 것치곤 잘 먹어서 살이 쪘다.

 예전 집의 비밀번호로 누르는 실수를 한 번 한 뒤로는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를 때마다 긴장하게 된다. 집 안에는 가죽 소파의 냄새, 선물로 받은 시트러스 계열의 디퓨저 향기, 매캐한 접착제 냄새가 뒤섞여 있다. 처음 왔을 때 공간을 채우고 있었던 노인의 체취는 자취를 감추었다.

 윗집에서 가끔 무언가를 쾅쾅 치는 소리를 제외하곤 거슬리는 타인의 소음은 없다. 내가 만들어내는 소음 중 가장 큰 소음은 피스타치오를 까먹는 소리 정도다. 딱딱한 소리를 내는 슬리퍼가 없고 폭식한 슬리퍼가 있다. 원두 가루가 묻은 리넨이 있고 정액이 묻은 티셔츠는 없다. 향수 냄새를 뒤덮는 숙취 냄새가 없고 비릿하고 들큼한 살 냄새가 있다. 

 오후 6시가 다가오면 가슴이 콩닥거렸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J가 도착하기 전에 침실 속으로 숨어들었다. 문을 잠갔다. 내가 내쉬는 숨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숨죽였다. 차가운 바닥에 두 무릎을 세우고 쪼그리고 앉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죽고 싶지는 않았고 죽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J는 언제나 새벽에 귀가했지만 나는 그 짓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았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 들이친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를 번갈아 흔들었다. 고개를 젖혔다. 부스스하게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등허리를 간지럽혔다. 쉬이 잠들 수 없을 만큼의 기쁨이 몰려들었다. J가 없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J의 존재가 숨 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했다. 그가 지구가 둥글고 태양이 뜨겁다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불행을 말했던 것처럼. 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걸 사랑이라 부르는 줄 알았다. 20년 동안 기를 쓰고 J를 놓지 못한 나는 단 두 달 만에 사라졌다. J는 나의 핑계였다. 

 ‘ㄱ’ 자로 이어진 싱크대 벽면에는 10CM짜리 정사각형의 푸른 타일이 붙어있다. 주기적으로 타일 쇼핑몰을 구경하는 습관이 있는데 오래전부터 장바구니에 넣어둔 타일이었다. 푸른 타일은 낮에는 하늘빛과 초록빛을 머금기도 하고 밤이 되면 밤바다처럼 새까맣게 빛났다. 주방의 작은 창 너머로 물살이들이 바다에서 튀어 오르는 것을 구경했다. 바다 위에 철새가 잠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새는 매번 정확히 15초 동안 잠수를 하고 물 밖으로 허겁지겁 뛰쳐나왔고 학교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 뛰어다녔고 종소리가 울리면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사하면서 찢어지고 부러졌던 몬스테라가 새 이파리를 내놓았다. 작년에는 꽃 한 송이 내놓지 않던 립살리스 로터스가 9개의 꽃봉오리를 만들었다. 그들이 놓인 베란다 구석엔 실같이 가는 다리를 가진 거미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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