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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울지 않는다.

울고 싶어도 울면 안 되는 자리, 아버지의 자리입니다.

by 신수현

아버지가 처음으로 불쌍해 보였다. 아버지가 나이 들어가는 것보다 먼저, 막내아들을 잃어야 했던 그 마음이 더 깊이 아프게 다가왔다. 그날,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몇 번이나 기절하며 숨을 헐떡였지만,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막내오빠는 위암으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게는 예고된 이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오빠와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가족 중에 처음 맞는 이별이었다. 아버지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고통을 가장 오랫동안, 가장 조용히 지켜본 사람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부모는 자식을 언제까지 돌봐야 할까? 막내오빠는 네 자녀의 가장으로서 성실히 일했지만, 병 앞에서는 결국 아버지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는 끝까지 치료받기를 원했고, 병원에서 생을 마무리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부모는 흔치 않다. 특히 일곱 형제를 둔 부모라면 더욱 그랬다.


오빠를 묻고 돌아오는 길, 오빠의 친구가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대들었다. “아버지가 수술 안 시켜줘서 친구가 죽었어요.” 그 순간 아버지의 눈빛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지 알면서도,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눈빛은 너무나 처량하고 불쌍해 보였다.


아버지는 자주 큰소리를 내는 분이었다. 가족을 위해서든, 원칙을 위해서든, 세상을 향해서든 그렇게 단단하고 우직하게 살아오신 분이었다. 하지만 그날, 누구보다 당당했던 아버지는 없었다. 말없이 고개를 떨군 그 모습은 깊은 죄책감과 슬픔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아버지는 결코 울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고, 슬픔도 억누르고, 외로움도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울음은 아마도 ‘부끄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슬픔조차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기에 아버지에게 울음은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부모의 자원은 한계가 있다. 아버지는 항상 현실적인 계산과 미래의 무게를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다. 막내오빠의 투병에 아버지의 재산을 쏟아붓는다면, 남은 시간과 자식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아버지는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릴 적에는 그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 게 부모 아닌가? 그런데 왜 아버지는 그렇게 냉정하게 보였을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책임이라는 무게를 조금씩 짊어지다 보니 아버지의 고통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그의 오래된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장부 한 권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누구에게 얼마나 보냈는지, 어떤 명목으로 지출했는지 한 줄 한 줄, 반듯한 글씨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고단한 세월과 가족을 향한 조용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올케언니는 수술비를 주지 않아서 죽은 것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아버지는 수술비, 통원비, 심지어 두 자녀의 학자금까지 마련해 두셨다. 그러나 올케언니는 그마저도 모두 해약하고 탕진해 버렸다.


아버지가 우셨던 모습을 나는 단 한 번 보았다. 막내오빠가 세상을 떠난 날이 아니었다. 엄마와 크게 다투셨던 날이었다. 이 가정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던 그날,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나와 막내딸을 두고 남은 세월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아버지는 조용히 등을 돌리고 눈물을 흘리셨다.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울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울음을 멈추는 법을 먼저 배웠던 사람이다. 그는 살아남는 법을, 지키는 법을, 그리고 침묵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다.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조금만 슬퍼도, 조금만 억울해도 마음보다 먼저 눈물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더 걱정하셨다. 아버지의 눈에는 내 미래가 보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을 만나며 상처받고, 무너지고, 그 감정에 갇혀 허우적거릴 내 모습을 미리 그리셨을지도... 그래서 아버지는 나를 단단하게 키우려 하셨다. 조금은 냉정하게, 조금은 무심하게, 그러나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가슴속엔 수많은 눈물이 썩어 있었을 것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울지 못한 시간들, 참아낸 날들, 표현하지 못한 사랑과 죄책감이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썩어 문드러졌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삶에 대한 이야기, 후회, 사랑, 그리고 용서에 대한 말들까지도...

하지만 아버지가 다가왔을 때, 나는 그 거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삶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나는 자꾸 멀어졌다.


가족이 낯설어지는 시간. 어쩌면 그 시간이, 가족에게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였는지도 모른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는 단지 울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모든 순간에도, 가슴속에서 얼마나 큰 파도가 일고 있었는지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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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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