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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의 행복

노력한 대가로 얻은 첫 수확...

by 신수현

우리 집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밭은 생활에 필요한 채소를 심는 정도였고, 주 수입은 언제나 논에서 나는 벼였다. 밭은 천 평도 안 되는 작은 규모였지만, 가지, 고추, 깻잎, 감자, 옥수수, 배추까지 계절 따라 다양한 작물들로 가득했다. 논농사는 늘 아버지와 오빠의 몫이었고, 밭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린 시절 다니던 학교에서는 ‘농번기’라는 휴일이 있다. 농사일을 돕기 위한 날, 공부보다 노동이 먼저여야 했던 날. 처음엔 신기해서 도왔지만, 그 노동의 무게를 몸으로 알게 된 뒤부터 언니는 도망치듯 학교로 향했고, 그 자리는 내 차지가 되었다.


봄이면 모내기를 마친 뒤, 빠진 모를 손으로 심는 ‘모 누비기’를 해야 했다. 어른 고무장화를 신고 100미터가 넘는 논을 왕복하며 손으로 흙을 짚고 모를 꽂는 작업은 중학생이 감당하기에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논물 속 거머리와 마주친 이후로, 나는 논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가을이면 추수를 마친 논에 볏단을 모아야 했다. 갈고리를 들고 허리를 굽힌 채 일하다 보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머리를 스쳤다. 손은 볏단을 모으지만 마음은 조급했고, 때론 눈물이 나기도 했다. 지금처럼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와 봉사하며 품앗이를 해주는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 도움은 아쉽기만 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어느 여름방학의 일이었다. 언니와 오빠는 모두 집을 비웠고, 집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만 남았다. 아버지는 나를 밭으로 데려가 감자를 캐셨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땅속에서 캐낸 감자를 리어카에 실어 옮기는 일이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감자가 실린 리어카를 끌고 평탄하지 않는 밭 사잇길을 오르내렸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중간에 포기하지 않았다. 하기 시작한 일은 끝내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고, 그건 어릴 적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다.


일을 마치고 아버지는 “수고했다”며 만 원을 건네주셨다.


그 순간, 나는 숨이 멎은 듯, 기쁘며, 행복하고, 여기 저리 밭을 뛰어다니고 싶었다.

나는 만원을 펼치며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엄마는 나의 행동이 우스우신지 바라보셨고, 엄마는 언니나 동생에게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만원.
천 원도 잘 안 주시던 아버지가.
말도 없이. 갑자기. 그 큰돈을.

처음부터 준다고 했으면 더 열심히 일했을 텐데...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 만 원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받은 아버지의 ‘인정’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기대하게 됐다.
청소를 하거나 심부름을 할 때, 혹시 또 만 원을 주실까 하고.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없었다.


밤에 부뚜막 숭늉을 떠다 드리는 것도 언니나 동생들과 눈치를 보며 미루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우리는 늘 누가 할지를 두고 미뤘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귀농한 젊은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농사일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긴 겨울을 쉴 수 있는 직업도 드물지 않나?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그때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본다.


지금의 만 원은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이다.
하지만 40년 전, 아버지가 건넸던 그 만 원은 지금으로 얼마나 될까?
어쩌면 돈보다 더 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버지가 가진 것 중 가장 큰 마음이었을 테니까...


아버지는 구두쇠가 아니었다.
그저 가진 것이 많지 않았을 뿐.
부모의 자산은 언제나 유한하다.
하지만 자식의 요구는 그 끝을 모른다.


도움을 받는 자식은 당연한 듯 도움을 받고,
도움 없이 살아가는 자식은 여전히 검소하게 산다.


자식을 위해 아까운 부모가 어디 있을까.
다만, 부모가 베풀 수 있는 시간과
자식이 원하는 시간이
서로 어긋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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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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