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흑백사진 속 미소는 마치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 웃음 속에 드러난 송곳니는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어릴 적, 나는 그 사진을 보며 아버지가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아버지도 젊은 시절이 있었구나’ 하며, 하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치아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이빨은 제때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시골의 사진관에는 잘 나온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곳에 부모님의 사진도 있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광고비를 받고 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진사의 자부심으로 걸어두던 시절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부모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엄마는 가끔 결혼식에 다녀오시면, 신부 화장이 예쁘지 않다며, 자신은 고슴도치 같아서 우리 자식들이 최고라고 하셨다. 우리는 고슴도치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앨범을 정리하다가 어릴 적 함께 찍은 사진 몇 장을 꺼내 보았다. 어린 시절에는 사진을 많이 찍었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나서는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 가장 오래된 사진 한 장, 그 사진 속 어머니는 한복을, 아버지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단정히 차려입고 계셨다. 그리고 내 옆에는 동생이 있었다. 사진 속 아버지의 미소는 어색하지 않았다. 누가 찍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진을 바라볼 때면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정말 좋아하셨을까?” 어느 날 어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그렇지 않았으면 일곱이나 낳았겠니?” 어머니는 웃으셨다. 하지만 그 많은 자식들이 나이 들어 아버지를 속상하게 했다면, 아버지는 그렇게 많은 아이를 낳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를 처음 안았을 때는 기쁘셨을까.
아버지는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셨다. 외아들이었고, 이미 결혼한 후였다. 큰오빠가 태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입대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군대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지만,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처음 입대했을 때 나이가 몇이냐고 물으면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어. 진짜 나이를 말하면 매를 맞았거든. 그래서 18살이라고 했지.” “진짜로 때렸어요?” “그래.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아버지는 씁쓸하게 웃으셨다. 그러고 보니 휴가를 나와 복귀할 때, 큰오빠를 안아주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이를 품에 안으면 더 보고 싶어질까 봐,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고. 우리 아버지 세대는 다 그런 걸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이 무관심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렇게라도 마음을 다스리려 하셨던 게 아닐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이름조차 잘 모를 정도였다. 다만, 할머니가 과부가 되시고 재혼하셨다는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었다. 그 시절 여자가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새 가족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사람과 친해지는 게 어려운 분이셨다. 나 역시 그런 면이 있다. 아버지와 닮았나 보다.
아버지는 배가 고프면 집안에 있는 음식을 몰래 드셨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도둑질이라며 매를 드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거짓말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잠깐 살았는데, 그 집에서의 기억이 선명하다. 마당 한쪽에는 빨간 큰 함지가 있었고, 그 안에 물을 틀어놓아 요구르트를 보관했다. 친구는 매일 요구르트를 배달받아 마셨고, 나는 그것이 부러웠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한 개를 집어 마셨다. 그날 밤, 할머니께서는 나를 씻긴다며 세게 꼬집으셨다. 눈물이 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배가 고플 때면 가슴이 먹먹했다. 음식을 먹으며 눈물이 나는 이유는 아마 그때의 기억 때문이겠지.
아버지의 삶은 처음의 연속이었다. 부모 없이 성장하는 것, 새아버지와 새 형제들과 함께하는 것, 결혼하는 것, 첫아들을 맞이하는 것, 그리고 군대를 가는 것.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며 아버지가 겪은 어린 시절은 너무나 큰 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전쟁이 아니라, 결혼과 자녀를 키우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싸움을 경험한 아이들은 그것을 전쟁과 같은 고통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부모가 겪었던 현실의 전쟁과 가정의 전쟁, 무엇이 더 힘들었을까?
“아버지는 왜 그렇게 무뚝뚝하셨어요?” 어느 날 어머니께 다시 물었다. “그게 다 너희 걱정돼서 그랬던 거야.” 그 말 한마디에 아버지의 침묵이 다시 떠올랐다.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이 이제야 가슴속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서 논과 밭을 유산으로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출판사를 물려받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논과 밭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팔지 말라는 유언을 지키며 농사를 시작하셨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쉽게 팔고 도시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고지식한 분이셨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내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인다. 아버지의 처음이 나에게도 처음이 되었다. 처음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끈기와 성실함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장하게도 만든다. 만약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라면, 나는 아버지에게 위대한 유산을 얻었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내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인다. 아버지의 처음이 나에게도 처음이 되었다. 처음이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끈기와 성실함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성장하게도 만든다. 만약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이라면, 나는 아버지에게 위대한 유산을 얻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