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이

가까운 사이일수록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

by 신수현 Mar 25. 2025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어두운 표정과 화난 목소리를 지니고 계셨으며, 저녁이면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가족보다 술잔을 더 가까이 두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궁금하기도 했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자와도 같았습니다.     


아버지의 40대부터 60대까지의 모습을 떠올리면, 우리가 웃고 떠들며 재롱을 부리던 시절에도 아버지의 모습은 밝았고, 나의 사춘기와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사춘기도 어둡고 분노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성장하여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독립할 시기가 되자, 아버지의 강한 모습은 사라진 듯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은 다르기에, 아버지가 자신의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고 계셨는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기 위해 다그치고, 윽박지르며 화내시고 발을 동동 구르셨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저에게 매우 성실한 분이셨습니다. 소리를 지르지 않는 한, 가정적이며 누구보다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신 분으로 기억됩니다. 아버지는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논의 물이 넘쳤는지 걱정하시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벼의 크기를 체크하시며, 추수를 마칠 때까지 작년과의 성과를 비교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안방에서 혼자 앉아 책상 앞에서 무언가를 기록하셨습니다. 현대에 태어나셨다면 선생님, 공무원, 교수와 같은 직업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어느 시대에 태어나셨든 아버지는 기록을 하시고 과거와 비교하며 미래를 예측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는 점점 조용해지셨습니다. 제가 27세가 되었을 때, 오빠들은 모두 분가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가정을 세웠고, 언니들도 결혼하여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외동딸로 태어날 것’이라고 소원했지만, 그런 시간이 왔어도 제 성격과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취업하여 독립할 때까지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고, 저는 전투를 치른 후 페허가 된 듯한 정적이 흐르는 집에서도 좋았습니다. 식사 후 조용히 아버지를 바라보면, 예전의 강한 모습과는 많이 달라진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예전에는 식사 자리에서 잔소리를 하셨지만, 지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음식을 드셨습니다.

     

어머니도 오랫동안 짊어져 온 자녀의 짐을 덜어내고 자유를 느끼고 싶어 하신 것 같았습니다. 농촌에서는 겨울이 여유로운 시간이며,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리 활동적이시고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셔서, 그날도 부녀회에서 일주일간 여행을 떠나시면서 아버지의 식사만 챙겨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정해진 시간인 아침 8시에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부터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피곤하면 눈을 붙이고 일어나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저녁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며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하루 세끼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것을 느꼈고, 시부모를 모시는 며느리는 식사만 챙기는 것이라도 정말 효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여행을 떠나신 날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면서 느낀 것은 아버지가 더 이상 저를 다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이 없다고 핀잔을 주시지도 않고, 낮잠 자는 저를 게으르다고 야단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예전의 엄한 표정이 없었고, 조용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는지, 그때 아버지는 우리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의 마음은 닫혀 있었고, 가까워지기에는 상처받은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대화가 없어도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강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예전처럼 강하게 대하지 않으셨고, 저도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불평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가족은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이입니다. 싸우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기에, 아버지를 밟고 아버지가 되려는 자식들이 아니기에,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식들이기에, 누군가에게 강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지 않았고, 대신 서로의 약함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되는 사이가 되었고, 그 사실을 인정하며 편안해졌습니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나는 아버지에게는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아버지도 저에게 강해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더 이상 강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이가 되었기에 그저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며, 시간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합니다.

화요일 연재
이전 04화 아버지의 등은 건강했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