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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울리는 게 후회야

당연한 것을 당연히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을 후회라고 명령할게

by 신수현 Mar 11. 2025

나의 사춘기는 특히 심각했습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더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원래 말수가 적었던 나는 더욱더 조용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내 감정은 내면에서만 맴돌았고, 가족과의 대화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동생은 장난스럽게 말했습니다. “언니, 사춘기인가 봐.” 귀찮다는 듯 흘려들었지만, 사실 그 말은 맞았습니다. 나의 사춘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조용한 반항으로 침묵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한때 단란하고 시끄럽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웃고 떠들었습니다. 작은 집에서 온 가족이 함께 지냈던 그 시절은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집은 3남 4녀, 총 7형제가 함께 살았습니다. 시골집에는 방이 세 개 있었고, 하나는 오빠들의 방, 다른 하나는 딸들이 쓰는 방이었습니다. 네 명의 딸이 있었기에 공간이 비좁았고, 결국 나는 동생과 함께 부모님이 계신 안방에서 잠을 자야 했습니다.


명절이 되면 할머니가 서울에서 내려오셨고, 나는 작은 방으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언니들과 작은방에서 지내는 것이 그마저도 좋았습니다. 불을 끄고 속삭이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들은 매우 따뜻했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한마디 하셨습니다. “불 끄고 자라!” 아이의 시간과 어른의 시간은 왜 다르게 흐르는 것일까요. 우리는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고, 아버지는 단순히 우리를 재우고 싶었던 마음이었나 봅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집은 확장되었습니다. 아버지는 2층 집을 지으셨고, 1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더 넓어진 안방과 2층에 생긴 작은 방들 덕분에 공간이 넉넉해졌지만, 반대로 가족 간의 거리는 더 멀어졌습니다. 사춘기가 찾아올 무렵, 부모님은 각자의 공간을 따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안방에서, 어머니는 거실에서 주무셨습니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각자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어쩌면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꿈이 없었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어 독립하고 싶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학교에 입학한 뒤로는 성적이 중하위권으로 밀려났고, 아버지는 나에게 더 열심히 하라는 말씀은 없으시고 “넌 중간만이라도 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속에서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잘하라고 야단치시는 것보다 마음의 상처가 되었고, 난 더더욱 나의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내게 한마디라도 해주셨다면,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보라고 한마디라도 건네셨다면, 나는 조금 더 빨리 내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버스를 타 본 적이 없습니다. 버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세대에 1시간의 거리는 우스웠기에, 우리 오빠 언니들 모두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로 통학을 하였습니다. 우리 집에서 시내로 가려면 오덕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했고, 학교까지는 1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거리를 매일 걸었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고, 나는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어쩌면 반갑게 인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피해 걸었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상처를 준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는 그날 저녁 약주를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에서 마주쳤는데도 아는 척도 안 하더라.” 아버지가 서운해하셨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하지만 사춘기였던 나는 여전히 무뚝뚝했습니다.   

  

요즘 영상을 보면, 군대에 갔던 아버지가 학교에 몰래 찾아와 딸을 만나고, 딸이 달려가 아버지를 안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후회가 밀려옵니다. 후회란, 가장 단순하면서도 하기 쉬운 일을 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렀을 때,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 아닐까요.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마주쳤을 때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입학하는 날, 어머니는 나에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버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단순한 문장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 말을 점점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듣고 싶으셨을 텐데,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자랐고, 학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장 단순한 말 한마디조차도. 그래서 후회는 더 아픈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줄 알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내가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면, 아버지는 분명 크게 웃으셨을 것입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나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그리움이 깊어지는 밤이면, 나는 그 다리 위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합니다. 우리 서로 마음속으로 이런 대화를 하겠지요 ‘많이 자랐구나’ ‘아버지 학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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