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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먹는 게 아니라 먹지 않는 것이다.

고등어 머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어주고 남는 것을 먹는 것이 부모다

by 신수현

아버지는 외출을 자주 하지는 않으셨다.

가끔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러 나가시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서 막걸리나 소주를 즐기셨다.


어릴 적, 나는 막걸리 심부름을 자주 했었다.

요즘은 병에 담긴 막걸리를 사지만, 그때는 노란 주전자를 들고 가서 받아와야 했다.

내 다리만 한 주전자를 들고 오는 길,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막걸리가 넘쳐 허벅지에 묻곤 했다.

아버지가 술을 드시는 날이면, 집안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곤 했다.

기분이 좋으실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풀리지 않는 마음을 술로 달래셨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의 발소리, 숨소리, 노랫소리로 그 감정을 읽곤 했다.

어느 날, 언니와 동생에게 말했다. “차라리 아버지가 다른 아줌마를 만났으면 좋겠어.” 동생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아버지를 만나겠냐?”

어떤 밤, 약주를 드신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투덜거리셨다.

내가 몇 번이나 술을 샀는데, 저 사람은 한 번도 안 사.”


우리 집은 겉보기엔 넉넉해 보였지만, 형제가 많아 늘 빠듯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교장, 교감 선생님 옆 흰색 테이블에 앉으셨다.

그 자리에는 학교에 후원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작지 않은 후원을 하며 이름을 알리셨다.

오빠들이 결혼하고, 조카들이 생겼다.

조카만 열네 명이다.

아버지 생신에 외식으로 막국수와 수육을 먹는 데 30~40만 원이 들었고, 엄마는 추석 때 조카들 양말 선물만 하는데도 10만 원이나 들었다. (1990년대 초, 그 돈은 적지 않았다.)


처음엔 생신도 집에서 모였지만, 점차 외식이 잦아졌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밖에서 먹는 돈이면 집에서 가족들이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밥을 먹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어느 날, 점심으로 부대찌개를 먹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 흔한 부대찌개 한 그릇, 아버지께 사드린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는 안 먹는 게 아니라, 먹지 않으신 것이었다.

아버지에게 한 끼 식사는 그저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가족이 둘러앉아 푸짐하게 나누는 것이었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가족들.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했던, 할머니 생신, 제사 준비하며 부엌을 가득 채웠던 시간들이 문득 그립다.

돌아가신 분을 꿈에서 보는 것은 흔치 않지만, 나는 아버지를 자주 꿈에서 보았다.

처음엔 특히 자주. 굶주린 모습으로, 때론 라면을 드시던 아버지의 모습이였다.

꿈에서 깨어나면, 점심마다 눈물이 났다. 부대찌개, 갈비탕, 순댓국, 제육볶음. 그 흔한 점심 식사조차, 아버지와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달팽이는 수명이 다하거나 병이 들면, 서서히 죽어간다.

특정한 종류의 달팽이는 자기 몸을 희생해 자식에게 영양분을 남기고, 마지막엔 살집 없는 빈 껍데기만 남는다.

어린 시절, 논두렁 옆 작은 개울가에서 둥둥 떠다니던 빈 달팽이 껍데기를 본 기억이 있다.

부모란 결국 그런 존재가 아닐까?

젊어서는 큰소리치며 살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도, 힘도 서서히 소멸해 간다.

죽을 때는 빈손으로 떠나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생명을, 시간을, 가진 모든 것을 내어준다.

서서히 이루어지는 희생이라 자식은 그 변화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지만, 부모는 자기 생의 끝을 알기에 하나씩 내려놓는다.

어떤 부모가 고등어 머리를 좋아하겠는가?

살이 많은 고등어 몸통을 자식에게 내어주고, 부모님은 고등어 머리를 발라 먹는다.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저 양보하고, 내어주기 위해서다.

먹는 것을 양보한다는 건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내어주는 일이다.



결국 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셨다.

손에 쥔 것도 없이, 마음만 남기고 떠나셨다.

텅 빈 듯 남겨진 자리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아버지는 평생, 먹지 못한 것이 아니라, 먹지 않으셨던 것임을.

우리가 푸짐하게 먹고 웃을 수 있도록, 당신은 조용히 젓가락을 놓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를 꿈에서 만나다

가끔,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꿈속에서도 혼자인 아버지는

또 외로이 앉아 식사를 하신다
고개를 숙이고,
목이 늘어난 난닝구를 입은 채,
작은 라면 한 그릇을 조심스럽게 드신다.

나는 꿈속에서도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채

그저 바라본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라면 국물을 떠먹는 아버지 손등이
어디서 그렇게 많이 상했을까 싶어
가슴이 저릿해진다.

눈을 떠도,
꿈은 오래 남아 가슴을 메이게 한다.



아버지께

아버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못 드신 것이 아니라,
먹지 않으신 것이라는걸
당신은 못 가지신 것이 아니라,
다 내어주신 것이었군요.

우리가 푸짐하게 먹고 웃을 수 있도록,
당신은 젓가락을 놓으셨고,
우리가 따뜻하게 입고 살 수 있도록,
당신은 오래된 옷을 꿰매 입으셨지요.

텅 빈 듯 남겨진 그 자리에서야
비로소 저는 압니다.
아버지는
텅 빈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고 가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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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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