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난 아주 지극히 평범한 한국 남자아이였던 것 같다. 나름 활동적인 편이었는데, 즉 공부는 안 하고 늘 놀기에 바빴고 놀아도 더 놀고 싶었다. 잘 기억은 나진 않지만, 어머니의 말로는, 밥 먹으러 들어오라고 해도 끝까지 안 들어가고 놀이터에 있었으며, 졸려서 눈이 빨개져도 더 놀겠다고 낮잠도 안 잤다고 한다.
공부는 정말 나랑 안 맞는다.
지금 돌아보면, 난 학창 시절 정말 공부를 안 했다. 왜 안 했을까 생각을 해보면... 왜 해야 되는지 몰랐다. 그냥 친구들과 놀기를 좋아했고, 성적을 잘 받아야겠다 하는 욕심도 없었다.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도 없었고,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 라는 생각은 정말 없었다. 나쁜 길로 빠진 학생도 아니었고 흔히 말하는 일진 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그냥 친구들과 열심히 놀았다. 중학교 들어서면서, 공부를 해야지 라는 주변에서의 말은 (특히 가족들에게...) 많이 들었지만 '공부를 한다'라는 개념이 없었다. 중학교 1학년때 엄마가 사준 주요 과목 문제집을 기말고사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펴본 적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내내 항상 성적 하위권의 학생이었다.
내겐 3살 터울의 누나가 있다. 내 어렸을 적 기억에 누나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잘하는 스타일이었다. 성적이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부모님이 누나에게 공부를 강제로 시키거나 하시지도 않았다. 누난 스스로 공부를 했고, 항상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부모님은 나 역시도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누나와 반대였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 때의 성적을 받아본 부모님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아마 '첫째는 알아서 잘했는데.... 얘가 가져온 이 성적표는 대체 뭐지?'라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 다만, 중학교 들어간 이후 첫 시험이었기에 부모님은 다음번엔 잘하겠지 라며 넘어가셨다. 그때 정확히 성적이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전 과목 평균 50~60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전혀 감흥이 없었고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지 않았기에 기말고사 역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말고사 성적 발표가 되는 날이 되었다.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말고사가 끝났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놀러 갈 생각밖에 없었는데 어머니가 '지금 데리러 갈 테니 그냥 집으로 가자'라고 하셨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빠가 많이 화나셨으니까 집에 들어가서 방에 있어라'라고 하셨다. 그렇게 방에 들어가서 혼자 있다가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들어오시는 소리를 들었고 그 이후 내 방에서 훈계를 목적으로 혼을 내셨다.
방에 혼자 있을 때, 밖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어디 있어?"
그리곤 종이봉투를 잡는 부스럭 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아버지가 내 방으로 들어오셨다.
바닥에 앉으라고 내게 말씀하신 뒤 종이봉투에 있는 물건을 보여주셨다. 바로 돈다발이었다. 한 달에 내게 들어가는 교육비 (운동, 과외, 학원 등)을 현금으로 인출하여 현금 뭉치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게 너한테 한 달에 들어가는 돈이다. 이런 식으로 성적 받을 거면 다 때려치워라"라고 하셨다. 그 외에도 무서운 톤으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사실 14살 (한국나이 중학교 1학년)이 무엇을 알겠는가? 세상 물정 그때부터 아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난 아니었다. 그때 말씀하신 말들은 기억이 안 나지만, 난 아버지와 마주 보고 앉아 '와 돈다발 처음 본다... 많다...'라고 신기해하고 있었다. 현금 다발까지 꺼내시며 훈계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이후에도 나는 잘해야 70점을 맞는 중하위권 학생으로서 계속 공부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던 평범한 어느 날, 중학교 3학년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담임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지금 너 성적이 더 올라가지 않으면 실업계 고등학교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뭐라고? 실업계를 가야 한다고?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공부를 안 했으면서 충격받았던 게 웃기긴 하다. 하지만 그때는, 내겐 나름 큰 충격이었다. 내가 중학교 때만 해도 실업계를 간다는 것은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그랬다. 마치 실업계를 가면 그대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공부라는 걸 시도해 볼 만한 이유를 찾았다. 그래도 인문계 학교는 가자!
그렇게 조금씩 공부라는 걸 접해보기 시작했다. 물론 재미는 없었지만 꾸역꾸역 책을 폈다. 외우라고 하는 것들은 외워지지 않고, 이해하라고 하는 것들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래도 노력이라는 걸 시도해 보긴 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한 노력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다 보니... 다행히 인문계는 갈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그렇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공부라는 건 정말 재미없었다. 이걸 몇 시간을 보면서 공부라는 걸 한다니... 공부를 잘한다는 반 친구들이 대단해 보였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문제를 잘 푸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특목고, 외고, 과학고 등을 준비하는 애들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책을 보며 지내는 걸까.... 대단해 보이면서도 내가 그렇게 한다면 늘 생각하면 숨통이 조이는 것 같았다. 공부는 절대 나랑 맞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정해진 시험문제에 정답을 맞히는 것은 나랑 맞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성적 못 받은 사람의 핑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그게 아닐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물론 나중에 고등학교 입학 포기 신청서를 들고 내가 배정된 인문계 고등학교를 방문했고, 고등학교 입학을 포기하였다. 나는 한국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한 적이 없다. 공부라는 걸 처음 시도해 본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생각하는 '미국 유학'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미국을 가게 된 내용은 다음 장에서 많이 다뤄질 것이다.
예술이 나의 길인가?
반 친구 중 한 명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내게 질문했던 것 중 하나가 기억에 남는 게 있는데, 그 친구는 외고를 준비하는 친구였고 (결국 외고에 합격해서 외고로 진학했다) 공부를 잘하는 걸로 나름 유명했다. 어느 날 내게 '너는 커서 뭐가 될래, 공부도 안 하고'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공부 좀 하라고 나를 다그치고자 했던 것 같은데, 공부를 해야겠다 보단 '그러게 난 커서 뭐가 되지'라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조금은 가졌던 것 같은데 그때 뭐가 되겠다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방송국 PD, 형사, 무대감독, 뮤지컬 감독, 작곡가, 영화감독, 등등...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본 것 같다. 주로 음악, 예술 분야였던 것을 보면 나름 음악을 좋아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했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하다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바이올린을 했는데 그래도 나름 약 10년간 바이올린을 켰다. 취미였지만 전국 콩쿠르 최우수상을 탄 적도 있고,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며 해외 연주까지 해본 경험도 있다. 그래서 진로를 생각할 때 음악 혹은 예술분야에 관심이 조금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진로를 그쪽으로 정하지는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예술분야는 늦었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유학을 결심하게 되면서 예술 분야로의 진로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음악 관련해서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는데, 나는 절대음감이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절대음감이라는 게 있는지 몰랐다가 나중에 내가 절대음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음을 들으면 그 음이 어떤 음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클래식, 가요, 팝송 등 어떤 음악을 듣더라도 음을 다 알 수 있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던 나는 그 멜로디를 그대로 따라 칠 수 있었다. 나는 이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피아노 곡을 들으며 음을 맞춰 멜로디를 따라 치는 나를 보고 주변에서 놀라는 모습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때 같이 있던 친구들에게 '원래 다 들리는 거 아니야?'라고 말했었는데 좀 재수 없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나한텐 항상 당연했는데 이게 이렇게 대단한 거였다고?' 하면서 잠시 자아도취를 했었다. 게다가 난 음악을 전공으로 하지 않았으니, 완전 우물 안 개구리였기에 '난 음악인이 돼야 하는 운명인 건가' 했던 적이 잠시 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절대음감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면서 금방 깨졌다.
주변에 많은 친구들이 음악을 하진 않지만, (비교적 많을 수도 있겠다) 우연치 않게도 나와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중 한 명은 (고맙게도 지금도 매우 친하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클래식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듣는다면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의 유명한 피아니스트다. 이 친구 (A라고 하겠다)는 미국 동부에 위치한 유명한 음대에서 졸업을 했는데, 미국 서부에 있던 나는 대학시절 때에 A를 만나러 한번 놀러 간 적이 있다.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던 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에 많은 충격과 감명을 받았었다. 특히, 놀러 갔을 때 연습실에서 밖으로 나오는 A의 모습을 아직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연습실에서 연습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팔꿈치에서 팔목까지 빨개져있으며 팔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아무리 날씨가 춥고, 잠깐 나온 거라 반팔을 입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딱 팔에서만 김이 날 수가 있나 싶었다. 연습을 많이 하면 원래 이렇다는 A의 말을 들으며 '천재에다가 노력까지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싶어도 안될 수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때 당시에 절대음감이라는 거에 대해 얘기를 했었고 그 자리에서 7개의 음을 동시에 치는데 7개 음을 다 맞추는 그 친구를 보고 '와 나는 음악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너무 잘한 선택이구나', '주변에서 절대음감 신기하다 소리 듣고 혼자 김칫국을 어마어마하게 마셨구나' 생각했다 (나는 고작 2~3개 음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지금도 음악 (특히 클래식)을 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무조건 말리고 보는데, 오지랖이고 주제넘은 것이라는 걸 잘 알지만 이게 다 A와 A의 학교에 있던 천재 음악가들을 만나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내 나름대로의 조언이다. 타고난 천재에 팔에 김이 날 정도로 노력을 하는 친구들이 세계에 정말 많이 있을 텐데, 취미로 즐기는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경쟁해서 먹고살 것인가 생각한다면 빨리 다른 길을 찾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졸업식
중학교 3학년 2학기 학기 말쯤,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한 달 동안 현지 Language School에 다니면서 미국 유학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기로 부모님과 합의를 봤지만 나는 가기 전부터 이미 미국유학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었다 (미국으로 떠나게 된 자세한 내용은 다음장에서 더 상세히 다룰 예정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기억 안나는 한 달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당연히 미국유학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고, 중학교 졸업식과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입학 포기 신청서 제출을 위해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중학교 졸업식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마 미국에서 생활할 생각뿐이었어서 그런 게 아닐까. 미국으로 떠난다고 나름 친구들한테 편지도 받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땐, 당연하게도, 이 중학교 졸업식이 내 마지막 졸업장 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이 날 이후, 졸업장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아예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두 개 다 졸업을 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마지막 졸업식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혼자 모험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고 새로운 세상에 뛰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기분과 설렘을 생각하면 지금도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뛴다.
그렇게 15살 때에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Ch.1 은 미국에서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내용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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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ife Journal] 서문.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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