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세계에 있다.”
이 문장은 자명한 것 같으면서도, 실은 고요한 의문을 품고 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 세계는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피난처인가,
혹은 타인을 넘어선 고독한 비행체인가?
‘인큐베이터’는 아이러니한 장소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내부는 세상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
그곳에선 빛은 조절되고, 온도는 일정하며, 외부는 차단된다.
내 세계가 인큐베이터라면,
나는 현실로부터의 충격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보호는 경험과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나는 질문한다.
“성장은 고립 속에서도 가능한가?”
“아니, 오히려 진짜 성장은 고립 없이는 불가능한가?”
반면, 내가 탄 것은 인큐베이터가 아니라 우주선일 수도 있다.
이 경우 나는 이미 지구, 즉 사람들 위를 떠나버린 자다.
나는 거리를 확보했다. 시야는 넓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고요한 진공 속을 떠도는 자가 되었다.
이 우주선 안에서 나는 사유한다.
무수한 인간 군집들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나는 그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이성을 갖춘 듯 보이지만,
사실 나는 그 어떤 관계도 맺지 못한 비유기적 존재다.
초월은 때로, 감각을 상실한 고립일 수 있다.
“나는 나의 세계에 있다”는 문장은
실은 나와 세계 사이의 경계를 긋는 행위다.
그러나 이 경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내가 고립을 성찰하면, 그것은 내면으로의 침잠이 되지만,
그 고립을 뛰어넘어 타인에게 다가갈 때,
그 순간 이 세계는 우주선이 아닌 문이 된다.
결국,
인큐베이터인지 우주선인지의 여부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이 세계는 마음을 회복하는 곳일 수도,
영원히 외부를 잃어버린 곳일 수도 있다.
나는 내 세계에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닫힌 자궁이 될 수도 있고,
지구를 떠난 관측기지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공간이 아니라,
나의 태도다.
나는 떠도는 중이며,
어쩌면 떠도는 그 자체가
인간으로서 가장 정직한 상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