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
그건 모르는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게 되고,
느끼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
좋은 차는 마케팅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진짜 운전자는 코너를 돌 때 아스팔트의 긴장감을 느끼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 차가 ‘나와 함께 멈추고 있다’는 감각을 안다.
그건 스펙을 읽는 눈이 아니라,
운전석의 침묵을 듣는 귀로 얻어지는 것이다.
좋은 옷은 입어야만 안다.
실루엣과 재봉의 언어는 사진으로는 감지되지 않는다.
그건 가슴팍의 원단이 햇빛에 닿는 느낌,
움직일 때 허리 뒤가 붓지 않는 디테일 속에서 온다.
어떤 사람에게 그것들은 ‘좋은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대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조용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설명해서 아는 사람.
그들은 스펙, 수상 경력, 평론가의 말을 따라간다.
누가 좋다 했는가? 왜 이게 명작인가?
그 정보들로 ‘좋음’을 채운다.
그들의 안목은 이해에서 시작되고, 분석으로 이어진다.
느껴서 아는 사람.
그들은 이유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설명 없이 감탄한다.
좋다는 말도 전에, 이미 감각이 인지하고 있다.
설명이 따라오지 않아도, 이해하지 못해도,
그 순간이 그저 압도적인 무엇으로 존재한다.
설명해서 아는 사람은 정보로 접근한다.
느껴서 아는 사람은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조예는 어느 날 문득 오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반복적으로, 조금씩…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것 위에서 감각은 자란다.
그리고 조예가 깊어지면,
우리는 설명 없이도 좋은 것을 알아보게 된다.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포장인지
그 오묘한 경계를 직감하게 된다.
느껴서 아는 사람도, 설명해서 아는 사람도
끝내 도달하는 것은 같다.
진짜는 결국, 설명을 초과한다.
어느 날,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는데도
“아, 이건 진짜다.” 하고 말하게 된다면,
그건 조예가 깊어졌다는 신호다.
설명에서 자유로워지고,
느낌으로 명료해지는 순간.